미국 포드 부통령은 1974년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가 취임 후 한 달 만에 내린 조치는 닉슨 사면이었다. 모든 참모가 말렸지만 그는 “분열과 증오를 딛고 미래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여론은 ‘협잡 사면’이라고 들끓었다. 닉슨이 포드에게 사면을 약속받고 대통령 직을 넘겼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포드는 대통령 신분으로 의회 청문회에까지 섰다.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면서 2년 후 대선에서도 졌다. 하지만 후세 역사가들은 “사면이 정치 파국을 막았다. 어려웠지만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했다.
▶1997년 12월, 15대 대선 사흘 후에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당선인이 마주 앉았다. 이 자리에서 군사반란·뇌물죄로 수감 중이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이 결정됐다. 두 사람 모두 전·노 전 대통령에게 구원(舊怨)이 깊었다. 일부 국민 반발도 컸다. 하지만 김 당선인은 사면을 건의했고, 두 사람을 구속시켰던 김 대통령도 대승적 결단을 내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7년 3월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으로 구속 수감된 지 4년 9개월째다. 대통령 재임 기간(4년 1개월)보다 더 길다. 해외에선 페루의 후지모리 전 대통령이 반인권·부패 혐의로 12년간 복역하다 사면받은 사례가 있다. 하지만 국내에선 노태우(768일), 전두환(751일) 전 대통령보다 훨씬 긴 역대 최장 기록이다. 박 전 대통령은 내년 2월이면 만 70세가 된다. 그동안 수차례 허리 디스크로 치료받았다. 칼로 베이거나 불에 덴 듯한 통증으로 잠을 못 이룬다고 했다. 한동안 의자가 없어 책을 받치고 앉기도 했다.
▶정치권에선 몇 차례 사면론이 나왔다. 여권에선 작년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 사면 카드로 야권을 분열시키자’는 얘기가 있었다.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는 올 초 “사면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여권 핵심에선 “촛불에 대한 배신”이라고 반대했다. 청와대도 “때가 아니다”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형집행 정지도 검찰이 불허했다.
▶이번 성탄절이나 신년에 박 전 대통령이 마지막 특사를 받을 것이란 전망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없던 일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꼬박 감옥에서 보내게 된 셈이다. 박 전 대통령은 지지자들과 주고받은 옥중 서신을 책으로 펴낸다고 한다. 그는 책 서문에서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삶의 무상함을 느꼈다”고 썼다. 한 시대의 권력자였지만 여성이기도 한 그의 아픔을 보듬고 넘어갈 아량을 보여줄 수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