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대기업 계열사 사장이 취임 직후 총수의 호출을 받았다. 총수는 금(金)으로 만든 명함을 선사하고 법인카드 사용한도도 예상보다 ‘0′을 하나 더 붙여주었다. 몇 달 뒤 총수가 청구서를 내밀었다. 비자금을 조성해 상납하라는 것이었다. “그 순간 교도소 담장이 어른거렸다”는 그는 ‘바지 사장’ 역할을 거부했고 결국 중도 하차했다. 몇 년 뒤 계열사 사장 2명이 횡령·배임 혐의로 감옥에 갔다.

▶천명관의 소설 ‘고령화 가족’엔 철없는 아들이 불법 도박장의 바지 사장으로 취업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들이 원하는 건 적당히 ‘가다’(’체격’이란 뜻)가 있으면서 적당히 어수룩해서 다루기 좋고 뒤탈도 없는, ‘핫바지’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바지 사장’의 어원엔 두 가지 설이 있다. 사업주의 불법 행위 책임을 대신 뒤집어 쓰는 ‘총알받이’에서 ‘받이’를 따온 것이란 해석과 ‘바지저고리를 입은 허수아비’에서 ‘바지’만 따왔다는 설이다.

▶정치권에서도 ‘바지 사장’이 논란이 된 사례가 적지 않다. 1985년 12대 총선 때 이민우 총재의 신민당이 민한당을 밀어내고 제1 야당 올라서는 돌풍을 일으켰다. 한껏 고무된 이 총재가 민정당이 요구하던 내각제 개헌을 수용하는 ‘이민우 구상’을 시도했다가 YS·DJ의 뜻을 거스른 죄로 쫓겨나고 말았다. ‘바지 사장’의 선을 넘은 대가였다.

▶오는 27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바지 임원’이란 말이 새 유행어로 등장했다. 산업 재해가 발생하면 대표이사나 안전 담당 임원에 대해 징역 2년 이상 형벌을 가하는 세계 최강의 산업재해처벌법이 가동되기 때문이다. 재해 때마다 오너나 대표가 감옥에 가면 회사가 유지될 수 없으니 대신 감옥에 가는 ‘방패막이’ 임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업주가 대표이사직을 내려놓고 안전책임자(Chief Safety Officer·CSO) 임원 자리를 새로 만드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신설 CSO 임원들은 “우린 ‘빨간 줄(감옥행) 임원”이라고 자조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엔 기업 대표이사를 형사처벌할 수 있는 각종 법과 규제 조항이 무려 2000여 개(벌금형 포함)에 이른다. 주 52시간을 어기면 징역 2년, 화학물질 신고를 소홀히 하면 징역 5년, 직장 내 괴롭힘 방지를 제대로 못하면 징역 3년 처벌 대상이 된다. 대기업 대표가 ‘위험한 직업’이 돼가고 있다. 감당 못 할 일을 강요하면 사람은 대응책을 찾는다. 60대 대기업 중 총수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곳이 23곳에 그친다. 비난만 할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