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래로 조선의 어린이들은 어른의 밑에 있어 ‘자유’라는 것을 절대로 얻지 못하고 자라났으므로 (중략)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여...” 1923년 4월 21일 자 조선일보는 어린이날 제정 소식을 이렇게 전했다. ‘어린이’라는 표현조차 낯선 시절이었다. “욕하지 말고, 때리지 말고, 부리지 말자”는 당시 어린이날 구호가 참혹했던 그 시절 아동 인권과 복지 실태를 엿보게 한다.

▶식민지 선각자들은 어린이날에 민족 독립의 염원도 담았다. 소파 방정환이 1929년 5월, 서울 지역 유치원 7곳 원아들을 장충단 공원에 초청해 잔치를 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소설가 심훈은 같은 달 7일 조선일보에 발표한 축시 ‘어린이날에’에서 어린이들이 훗날 독립국가 시민으로 살게 되기를 소망했다. ‘해마다 어린이날이면 비가 나립니다/(중략)/ 몇번만 더 빗발이 뿌리고 지나가면/ 이 강산의 주름살도 펴진답니다// 시들은 풀잎 우거진 벌판에도 봄이 오면은(하략).’ 방정환도 이듬해 한 기고문에서 “적게는 우리 가정에, 크게는 우리 민족 전체에, 더 크게는 인류 전체에 새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일제(日帝)는 그런 어린이날을 탄압했다. 축하 행렬조차 불허했다. 우리는 우리대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반목하며 어린이날 행사마저 각자 따로 여는 사태를 빚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어린이날을 비롯한 모든 집회가 금지됐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5월 첫 일요일, 어린이날 행사가 재개되자 많은 사람이 감격했다. 마침 그날이 5일이어서 이후 5월 5일로 고정됐다.

▶어제가 100번째 어린이날이었다. 세계 최빈국에서 1인당 소득 3만달러 나라로 도약하는 사이, 어린이날은 크고 작은 변화를 겪었다. 신생 대한민국은 어린이날을 서울운동장에서 대통령이 참관하는 대규모 축하 행사로 치렀다. 1975년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국가 행사 의미는 축소되고 ‘국민 나들이 날’로 탈바꿈했다. 가난을 벗어났지만 여행이 보편화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다들 어린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동물원이 있던 창경원(창경궁)엔 그날 하루 수십만명이 몰렸고 미아 사태가 속출했다.

▶지난 2년, 코로나로 어린이날도 크게 위축됐었다. 다행히 올해 거리 두기가 해제되며 모처럼 가족 나들이가 재개됐다 전국의 유원지·테마파크며 김포공항 주차장은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개방되는 청와대가 내년 어린이날엔 어떤 모습으로 어린이들을 맞게 될지도 궁금하다. 100번째 어린이날을 맞기까지 흘린 땀이 후손에게 풍요를 선사했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