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 나오는 여고생 시원은 아이돌 그룹 H.O.T에 빠져 살다가 성적이 꼴찌로 추락한다. 아빠가 딸 방에 가득한 H.O.T 사진을 찢어버리며 홧김에 “부녀의 연을 끊자”고 고함치자 딸은 곧바로 대든다. “아저씨, 누군데요?” 아빠는 기가 막혔는지 “네 성격이 개 같다”며 시원을 ‘개딸’이라 부른다. 시원은 그러나 아빠의 건강을 염려하는 딸이기도 하다. 다만 그럴 때조차 거친 부산 사투리로 “아빠, 건강 갖고 까불면 안 되는 것 모르나?”라며 나무란다. 드라마 속 개딸엔 이처럼 겉으론 거칠어도 가슴엔 무조건적 아빠 사랑을 품은 딸이란 의미가 중첩돼 있다.
▶우리말 접두어 ‘개’는 쓰임새가 많은 어휘다. ‘개살구’나 ‘개떡’의 ‘개’는 ‘질이 떨어진다’는 의미다. ‘개꿈’ ‘개죽음’처럼 헛되거나 쓸모없다는 뜻도 있다. ‘개’가 붙었다고 형편없다는 뜻만 있는 것도 아니다. 개망초는 하얀 꽃이 피고 향기도 은은하다. 정작 망초는 꽃이 볼품없고 피는 둥 마는 둥 시든다.
▶소중한 것을 일부러 낮춰 부를 때도 ‘개’를 쓴다. 우리 조상은 귀한 자식일수록 평범하게 키워야 무병장수한다고 믿었고, 그런 마음을 ‘개’가 들어간 아명(兒名)에 담곤 했다. 조선 고종의 아명도 ‘개똥’이다. 요즘 청년들은 ‘개’를 붙여 못 만드는 말이 없다. 아주 예쁠 때 ‘개예쁘다’ 하고 매우 좋을 때는 ‘개좋다’고 한다. ‘개웃김’ ‘개이득’도 자주 쓴다 . 해결책을 찾지 못할 때는 답이 없다는 의미로 ‘개노답’이라 한다.
▶'개’엔 ‘정도가 심하다’는 뜻도 있다. 언제부턴가 특정 정치인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표현할 때 쓴다. 몇 해 전 조국 전 법무장관을 지지하는 서울 서초동 촛불 집회를 주도한 개혁국민운동본부는 원래 이름이 ‘개싸움국민운동본부’였다. ‘조국을 위해 개처럼 싸운다’는 뜻이라 했다. 최근엔 이재명 전 경기지사를 지지하는 2030 여성들이 개딸을 자처하며 “아빠, 사랑해요”를 외친다.
▶정치인에 대한 지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그것을 아빠와 딸 관계라고 부르며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팬덤화(化)한 지지가 정치인의 양심과 양식을 마비시키고, 편 가르기와 내로남불 등 온갖 반(反)지성적 행태를 양산했다. 지난 5년간 지겹도록 확인한 사실이다. 민주당 복당을 추진하던 양향자 의원이 엊그제 “개딸에 환호하는 민주당은 슈퍼챗에 춤추는 유튜버같다”고 한 것도 ‘개딸’ 현상에 깃든 맹목적 지지의 위험을 경고한 것으로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