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이 정치적 수난을 겪고 있다. 겉은 녹색인데 속은 빨갛다는 점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선 진작에 ‘수박 정치학’이 등장했다. 겉으로 찬성하는 정당과 속으로 지지하는 정당이 다를 때 썼고,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두드러졌다. 잠비아 야당은 ‘수박 캠페인’을 펼친 적도 있다. 밖엔 집권당 색인 초록 옷을, 안에는 야당을 지지하는 빨간 옷을 입자는 선거 운동이었다.

▶해방 이듬해 창간된 좌파 신문 ‘독립신보’는 1947년 ‘거리’라는 칼럼을 통해 좌익의 스펙트럼을 과일·채소에 빗대고 있다. ‘수박같이 거죽은 퍼렇고 속이 빨간 놈도 있고, 수밀도 모양으로 거죽도 희고 속도 흰데 씨만 빨간 놈이 있고…’ 하는 식이다. 안팎이 모두 붉으면 토마토 혹은 고추라고 했다. 수박을 ‘기회주의자’로, 수밀도를 ‘진짜 빨갱이’로 분류한 점이 흥미롭다. 씨부터 빨개야 진짜 대접을 받은 셈이다.

▶작년 9월 민주당에 수박 논쟁이 점화됐다. 커뮤니티 공간에 잠복해 있던 이 ‘말 폭탄’은 이재명 후보가 직접 대장동 특혜를 반박하면서 뇌관이 터지고 말았다. 그는 “공영개발을 포기하라고 넌지시 압력을 가하던 우리 안의 수박 기득권”이라며 칼을 뺐다. ‘우리 안의 수박’은 당연히 민주당 내부를 가리켰다. 이낙연 측이 수박을 호남 비하라며 쓰지 말라 했는데, 이재명이 되받아친 것이다. 관용구일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양쪽은 부글부글 끓었다.

▶수박이 한창인 요즘 민주당이 또다시 ‘수박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6·1 지선 참패 후 비명(非明)계가 ‘이재명 책임론’을 들고 나오자 개딸들이 “너희는 수박이라서 겉은 민주당 같지만 속은 빨개서 국민의힘 편”이라고 화살을 퍼부었다. 원래는 좌파가 적색인데, 국민의 힘 상징색이 빨간색이라 좌우가 뒤바뀌어 버렸다. 수박 싸움이 달아오르며 박 터지게 싸우자 당 비대위원장이 “수박 표현 쓰면 가만 안 두겠다”고 나섰다.

▶이집트는 ‘30년 독재자’ 무바라크가 실각한 뒤 무슬림과 군부가 번갈아 정권을 잡았지만 대국민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수박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유세 때 돈 받고 모인 사람을 ‘수박 군중’이라고도 했다. 어떤 이재명 지지자는 ‘수박 대표 명단’이란 글을 올렸다. “기록을 위해 담벼락에 써놓겠다”며 이낙연 후보를 비롯한 상대 진영 인물 9명 이름을 적었다. “참 정치 수준 하고는…” 혀를 차는 독자가 많다. 수박에 입이 있다면 “제발 나좀 가만히 두라”고 비명을 지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