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벳 문명권에서 마지막 철자 ‘Z’는 ‘궁극적인 경지’ 또는 ‘최종적인 사태 해결’을 상징한다. 대중문화 캐릭터 ‘쾌걸 조로’가 그런 사례다. 조로(Zorro)는 홀연히 나타나 악당에게 철퇴를 가한 뒤 ‘정의를 실현했다’는 취지로 칼을 휘둘러 자신의 머리글자 Z 표시를 남기고 떠난다. 브래드 피트 주연의 좀비 영화 ‘월드 워 Z’의 Z도 인류 명운을 걸고 좀비와 벌이는 마지막 전쟁이란 의미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Z를 긍정적인 의미로 즐겨 활용한다. 포켓몬의 필살기 이름이 ‘Z 기술’이다. 전투 중 한 번밖에 못 쓰지만 대신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로봇 ‘마징가Z’는 어떤 공격에도 파괴되지 않으면서 가볍기까지 한 상상의 금속 ‘초합금 Z’로 만들어졌다. Z는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제왕 제우스(Zeus) 또는 정점(zenith)을 떠올리게도 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Z가 나치의 하켄크로이츠에 버금가는 국제적 기피 대상으로 전락했다. 러시아가 자국 탱크와 트럭에 피아 식별용으로 Z를 써붙이면서다. Z의 뜻은 분명치 않지만 러시아어 ‘승리를 위하여’(za pobedy)’에서 비롯됐거나 서쪽(zapad)인 우크라이나로의 진격 방향을 나타낸다는 추정이 나와있다. 어떤 의미든 국제적 시각에선 침략의 상징적 기호가 됐다.

▶일본 항공사 ‘집(Zip) 에어 도쿄’가 엊그제 자사 항공기에 새긴 Z 로고를 지우겠다고 발표했다. ‘zip’은 ‘쌩쌩 난다’는 뜻으로 러시아와 무관한데도 회사 이미지 악화를 우려해 내린 조치다. 스위스 도시 취리히(Zurich)에 있는 취리히 보험도 Z가 들어간 회사 로고를 당분간 쓰지 않기로 했다. 삼성이 만든 접는 휴대전화 갤럭시Z도 유럽에선 폴드3, 플립3으로 이름을 바꿔 판매한다. 모두 회사 로고나 제품명에서 Z를 뺐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리투아니아는 Z가 들어간 기호나 문양을 금지하는 법도 제정했다. Z를 ‘전체주의 권위주의 정권’과 ‘군사행동, 반인륜·전쟁 범죄 자행을 부추기는’ 상징물로 규정했다.

▶Z는 알파벳에서 X와 함께 사전 표제어가 가장 적은 철자다. 안 그래도 사용 빈도가 낮은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입지가 더 좁아졌다. 그런 와중에 Z의 복권(復權) 움직임도 시작됐다. 러시아의 한 록 밴드가 ‘Z세대’라는 곡을 발표했는데,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러시아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우크라이나에서 침략자가 물러나고 궁극적인 평화의 상징으로 Z가 거듭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