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을 거역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선조의 분노는 여러 기록에 나와 있다. 출정 명령을 듣지 않자 삼도수군통제사 이 장군을 “한산도 장수”로 낮춰 부르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편안히 누워만 있다”고 했다. 투옥한 다음엔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게 돼 있다”며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겠다”고 했다. ‘장하(杖下)에 죽는다’는 말이 있다. 끝까지 매를 때리겠다는 것은 끝내 죽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구명 운동이 시작됐다. 이 장군의 종사관을 지낸 정경달(丁景達)이 조정에 달려가 외쳤다. “이순신의 전쟁 능력은 예를 찾을 수 없습니다. 싸움을 미루는 것은 전술인데 어찌 죄입니까. 그를 죽이면 나라가 망하는데 어찌 하시렵니까.” 대놓고 “임금이 틀렸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고 막힌 가슴을 뚫어주는 시원한 발언이지만 임금의 분노에 기름을 부어 구명은커녕 이순신을 오히려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선조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우의정 정탁(鄭琢)이 상소문을 올렸다. “이순신은 큰 죄를 지었지만 성상께서는 극형을 내리지 않고 인(仁)을 베푸시려는 일념으로…이순신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아보시려고… 생명에 대한 임금의 어진 뜻이 죽을 죄를 진 자에게까지 미치니 감격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임금의 속 좁은 뜻과 반대였다. 정탁도 알면서 그런 것이다. 성인군자로 추켜세우니 임금은 어쩔 수 없었다. 문제아에게 “잘한다, 잘한다” 하면 잘하는 때가 있는 것과 같다.

▶상소문은 이순신을 깔아뭉개는 문장으로 이어진다. “용기로 치면 원균에게 미치지 못하고 남의 공로를 탐내서 제 공로로 만들어 속였기 때문에 이순신이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이순신의 작은 공적 몇 가지 열거한 다음 “무릇 인재는 나라의 보배이므로 주판질하는 사람까지 재주가 있으면 아껴야 하는데 장수의 재질을 가진 자를 오직 법률에만 맡길 수 있겠느냐”고 호소했다.

▶정탁의 상소문은 거의 사실이 아니다. “하얀 거짓말”이라고 할까. 선조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거짓말에 마음을 돌렸다. 이순신을 죽이면 졸장부라는 말이니 선조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상소문이 이순신을 살렸다. 결과적으로 나라를 구했다. 정탁의 상소문은 최고의 상소문으로 꼽힌다. 결과만 대단해서가 아니라 염라대왕의 마음도 바꿀 수 있는 완벽한 설득의 기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상소문 초고가 국가 보물에 지정될 것이라고 한다. 아직 보물이 아니었다는 게 오히려 의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