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시리즈를 쓴 소설가 이언 플레밍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소련을 악의 화신으로 그리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영화로 만들어진 007은 달랐다. 악당은 소련 KGB가 아니라 KGB 출신이 가담한 국제 테러 조직 ‘스펙터’라는 식이었다. 톰 크루즈가 주연한 1986년 ‘탑건’에 나오는 적국 전투기는 미그 28이다. 그런데 미그 28이란 전투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련과의 혹시 모를 분란을 이런 식으로 피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할리우드와 유럽 영화가 특정 국가를 대놓고 악당으로 묘사한 사례는 많지 않다.
▶탑건 후속작 ‘탑건-매버릭’도 마찬가지다. 전투기 조종사 임무는 유엔 결의를 위반한 적국의 우라늄 농축 시설 파괴다. 그런데 적국 전투기에 국기가 없고 그들이 쓰는 언어도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 없다. 북한이나 이란일 거란 분위기만 낸다. 한국 영화는 이런 문제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범죄도시 2′는 베트남 호찌민(옛 사이공)을 납치·살인이 난무하는 무법 도시로 그렸다. 베트남은 이 영화의 자국 내 상영을 불허했다.
▶남미 국가 수리남이 이달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을 법적으로 문제 삼겠다고 했다. 이 나라를 마약 거래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묘사했다는 게 이유다. 마약 운송 국가 이미지를 벗기 위한 그간의 노력이 한국 드라마 탓에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14일 기준 ‘수리남’은 넷플릭스 TV쇼 부문 전 세계 3위다. 이런 주목도 높은 드라마가 부정적으로 묘사하면 어떤 나라든 자국 이미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자국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외국 콘텐츠에 참기만 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한국을 마약이나 성매매 천국으로 묘사한 영화가 세계 3위로 관객 몰이를 한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기 어려울 것이다. 영화·드라마뿐만이 아니다. 옛 국명이 터키였던 튀르키예는 1980년대 일본 퇴폐 목욕업 명칭이 도루코부로(トルコ風呂·터키탕)인 것에 항의해 ‘소프랜드’로 이름을 바꾸게 했다. 이탈리아는 한국 때수건 이름이 이태리타월이라는 걸 불쾌해한다.
▶K팝과 영화·드라마 강자로 도약한 한국은 이제 영미와 유럽의 문화 강국들처럼 전 세계를 의식하며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나라가 됐다. 세계는 우리를 향해 박수만 치는 것이 아니다. 전엔 그냥 넘어갔던 것들에 섭섭해하고 화도 낸다. 수리남이란 국명을 굳이 쓰지 않고도 같은 내용의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갈등이 원만히 수습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