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에선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 등 국가에 해를 끼칠 자를 국외로 쫓아내는 ‘도편(陶片)추방제’가 있었다. 시민들이 도자기 조각에 이름을 적어 내는데, 6000표 이상 받으면 10년간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다. 그런데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물리친 전쟁 영웅 테미스토클레스가 도편 추방의 제물이 됐다. 최근 고고학자들이 그의 이름이 적힌 도편들을 조사한 결과 많은 도편이 한 사람 글씨체로 쓰인 사실이 발견됐다. 정적(政敵) 제거를 위한 투표 조작이 있었던 것이다.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이승만 정권을 무너트렸다. 당시 여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온갖 꼼수가 동원됐다. 투표함의 4할을 이기붕 표로 미리 채워 놓는 ‘4할 사전 투표’, 사망자를 선거인 명부에 끼워 넣는 ‘강령술’, 개표 검표원을 매수해 야당 표를 바닥에 떨어뜨린 뒤 줍는 척하며 지장을 잔뜩 찍어 무효 표로 만드는 ‘피아노표’(피아노 건반 두드리듯 한다는 뜻) 같은 기상천외한 방법이 동원됐다. 1992년 군 부재자 투표에서도 ‘여당 후보 찍기’ 부정선거가 폭로돼 파문이 일기도 했다.
▶독재국가에선 지금도 반문명적 부정선거가 횡행하고 있다. 북한에선 투표 방식이 단일 후보에 대한 찬성과 반대뿐이다. 투표 용지 앞면은 후보 이름이 적혀 있고 뒷면은 ‘찬성’이 적혀 있다. 찬성은 그냥 접어서 투표함에 넣으면 되지만, 반대할 경우 후보 이름 옆에 X표를 해야 한다. 100% 찬성이 나올 수밖에 없다. 2000년대 들어서도 볼리비아, 페루, 키르기스스탄 등에서도 부정선거가 탄로나 대통령이 쫓겨나는 정치 혁명이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밀리자 푸틴 대통령이 군 동원령을 내리고, 우크라이나 4개 지역의 편입을 위한 주민 투표를 강행하고 있다. 그런데 투표함이 ‘투명 투표함’이어서 세계적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기표를 마친 투표 용지를 선관위 직원에게 펼쳐 보이고, 접지도 않은 채 투명 투표함에 넣는 장면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공개투표나 다름없다.
▶투명 투표함은 프랑스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한 번에 2~3개 투표 용지를 넣는 부정 투표를 감시하기 위한 장치다. 단 비밀투표를 보장하기 위해 투표 용지를 별도 봉투에 담아 함에 넣는다. 같은 투명 투표함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기능을 발휘한다.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지만, 공정하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무덤이 될 수 있다. 부정선거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저열한 공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