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일의 유엔기념묘지인 부산 유엔기념공원 홈페이지는 4개 언어로 서비스된다. 한국어·영어·프랑스어·튀르키예어가 그것이다. 6·25 전쟁 당시 약 1만1000여 유엔군 전몰 장병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가 대부분 본국으로 이장되고 지금은 11국 2320구 유해가 남아 있다. 영국(890명)에 이어 튀르키예 병사(462명)가 둘째로 많이 남아 있다.

▶1950년 10월 17일 튀르키예의 보병 여단 선발대가 부산항에 도착했다. 총 2만1212명을 파병했고 1000여 명의 전사자를 냈다.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넷째로 참전자 숫자가 많다. 1951년 초 유엔군의 반격 작전이었던 용인 김량장전투에 투입돼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전공(戰功)을 세웠다. 6·25 전쟁에 적극 참전한 것은 나토 가입 열망 때문이었다. 1949년 4월 4일 워싱턴 조약으로 미국과 서유럽 12국이 나토를 창설했다. 소련의 팽창에 위협을 느끼던 튀르키예도 나토 가입을 희망했지만 미국과 유럽은 시큰둥했다. 6·25 전쟁이 터지고 유엔이 파병을 결정하자 발 빠르게 동참해 자유 수호에 앞장섰다. 그 공로로 1952년 나토 회원국이 됐다.

/일러스트=박상훈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튀르키예는 48년 만에 월드컵에 진출했다. 브라질과 첫 경기에서 한국인 주심이 튀르키예 선수를 퇴장시킨 바람에 브라질에 역전패했다. 반한(反韓) 여론이 커졌는데 한국과 맞붙게 된 월드컵 3·4위전이 이를 뒤바꿔놓았다. 당시 온라인에는 한국과 튀르키예가 ‘형제의 나라’이니 둘 다 응원하자는 여론이 일었다. 3·4위전이 열린 대구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 관중이 세계에서 가장 큰 튀르키예 국기를 펼쳐 보였다. 경기가 끝나자 양국 선수들이 유니폼을 바꿔입고 상대방 국기를 든 채 어깨동무를 했다. 그 이후로 튀르키예에 한국 사랑 열풍이 불었다.

▶튀르키예 사람들의 국기(國旗) 사랑은 유별나다. 국경일이 아닌데도 빨간 바탕에 흰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국기가 나라 전역에 휘날린다. 이 국기는 오스만 제국 시절이던 1844년 채택된 것이다. 오스만 제국(1299~1922년)은 623년간 존속하면서 서남아시아, 남유럽, 북아프리카까지 광활한 영토를 거느린 강대국이었다.

▶대지진을 겪은 튀르키예에 우리 국민의 구호물품과 온정이 쏟아진다고 한다. ‘형제의 나라’라는 공감대가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튀르키예와 외교적 긴장 관계인 나라들도 지진 참사에는 적극 돕는다고 한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재난 현장의 아픔에 공감하는 인류애가 세계 시민으로서의 자격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