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뱅크(SVB)가 빛의 속도로 파산하자, 전 세계 투자자들은 사건 유형 파악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사건 유형이 회색 코뿔소(grey rhino), 검은 백조(black swan) 둘 중 어느 쪽이냐는 것이다. 검은 백조는 도저히 일어나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9·11테러, 소련 해체, 1차 세계대전, 2008년 리먼 사태가 이런 유형에 속한다. SVB 사태가 검은 백조형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란 뜻이다.
▶안개가 조금 걷히고 보니 SVB 사태는 회색 코뿔소 범주라는 데 의견이 모이고 있다. 회색 코뿔소는 검은 백조와는 반대로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사전 대처를 소홀히 하다 당하는 위기를 의미한다. SVB는 예금이 들어오는 족족 미 국채에 투자했다. 미 연준의 금리 인상으로 채권 값이 폭락하자 유동성에 문제가 생겼다. 미리 현금 비중을 늘리거나 금리 헤지형 상품으로 자산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해야 했는데, 손을 놓고 있다가 위기를 자초했다. 회색 코뿔소형이라면 수습 가능하다.
▶회색 코뿔소, 검은 백조처럼 경제·금융 용어 중엔 동물이 등장하는 사례가 많다. ‘흰 코끼리’(white elephant)는 귀중한 존재이지만 쓸모가 없어 처치곤란한 물건을 의미한다. 냄비 속 개구리(boiled frog)처럼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 채 위기를 맞은 SVB에 미 국채는 흰 코끼리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증시 약세장을 뜻하는 ‘베어 마켓’(bear market)은 우뚝 선 채 발톱을 위에서 아래로 할퀴는 곰의 습성에서 따온 말이다. 반대로 황소(bull)가 뿔을 위로 치받는 모습을 본 따 강세장을 불 마켓이라고 부른다. 약세장에서 주가가 반등해 튀어오르는 국면을 ‘데드 캣 바운스’(dead cat bounce·높은 데서 떨어뜨리면 죽은 고양이도 튀어오른다는 의미)라고 부르기도 한다. 새해 글로벌 증시 상승세를 두고 불 마켓 전환이냐, 데드 캣 바운스냐는 논쟁도 벌어진다.
▶미국 지방은행의 파산이 글로벌 증시에 북풍 한파를 몰고 왔다. 세계 금융주 시가총액이 하루 새 600조원 이상 증발했다. 나비 날갯짓이 폭풍우를 몰고온다는 나비효과(butterfly effect), 꼬리가 개의 몸통을 흔드는 ‘왜그 더 도그’(wag the dog) 현상이라 할 만하다. ‘매(hawk)’로 돌변해 금리 인상 칼을 휘둘러온 미 연준 파월 의장이 위기 확산을 막기 위해 다시 ‘비둘기(dove)’로 돌아서 3월엔 금리를 동결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