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기자들의 취재 방법 중 하나가 ‘귀 대기’였다. 중요한 회의나 모임이 있는 현장의 닫힌 문틈에 귀를 바짝 붙여 모깃소리처럼 흘러나오는 얘기를 듣는 것이다. 원시적이지만 들리기만 하면 이렇게 확실한 취재가 없다. 실제 정당, 검찰 출입기자들 사이에선 전설처럼 전해지는 ‘귀 대기 특종’ 사례가 적지 않다.
▶엄밀하게 따지면 이는 처벌 가능성은 낮지만 위법 소지가 있다. 통신비밀보호법은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 또는 청취하는 행위’를 처벌하기 때문이다. 이 법에 따르면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제3자가 몰래 대화를 녹음하거나 청취하면 불법이다. 그러나 대화를 나누는 사람 중 한 명이라면 그가 몰래 녹음을 했다 해도 합법이다. 지난 정권 때 정권에 찍힌 판사가 김명수 대법원장과의 대화를 녹음해 공표했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통화 녹음의 위력은 크다. 김 대법원장도 애초 관련 사실을 부인하다 판사의 대화 녹음 공개로 거짓말이 들통났다. 녹음이 없었다면 그는 끝까지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대장동 사건도 대장동 일당의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파장이 커졌다. 녹음은 통화나 대화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직장 내 갑질, 폭언 등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자기방어적’ 목적도 있다. 그래서 소송의 필수 증거자료가 됐고 이젠 의뢰인들에게 녹음을 권하는 변호사도 있다. ‘녹취 전성시대’다.
▶민주당의 2021년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이정근 민주당 전 사무부총장의 휴대전화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검찰이 압수한 그의 휴대전화에 담긴 녹음 파일 3만여 개 중 일부에 금품 살포 단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의 전화엔 자동 녹음 기능이 설정돼 있었다고 한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사팀으로선 그 녹음을 듣는 것만으로 수사가 저절로 된 셈이다.
▶이씨 전화는 국산폰일 가능성이 높다. 미국 아이폰은 통화 녹음 기능을 제공하지 않는다. 애플 본사가 있는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미국 10여 주(州)에선 상대방 동의 없는 통화 녹음이 불법이기 때문이다. 반면 삼성은 일본·중국·인도 등 통화 녹음을 법적으로 허용하는 37국에서 팔리는 제품에 통화 녹음 기능을 넣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이 통화 녹음을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했다가 철회했다. MZ세대를 중심으로 사회적 약자의 방어 수단을 빼앗는다는 반발이 거셌다고 한다. ‘상대가 대화를 녹음하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