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1970년대 반도체 절대 강자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반도체 원조 국가다. 그런데 일본은 이 반도체가 가진 힘을 누구보다 빨리 파악했다. 일본 정부가 나섰다. 미국 기업들을 따라잡기 위해 일본 통상산업성 주도로 ‘초LSI기술연구조합’이라는 민관 연합 기구를 만들었다. 설계 기술 확보를 위한 R&D 명목으로 일본 정부 예산의 0.1%에 해당되는 거액을 후지쓰, NEC 등 일본 반도체 기업에 몰아줬다. 거의 0%에 가까운 금리로 자국 기업에 돈을 빌려주면서, 외국 반도체 기업에 대해서는 기술이전을 요구했다.

▶그 결과 1980년대 일본 반도체가 세계 최강이 됐다. 소니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와 극우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가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에서 미국에 할 말은 하자고 할 수 있었던 것도 일본이 ‘반도체 파워’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출액 기준 상위 세계 10개 사 중 6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더 이상 미국이 참고 있을 수 없었다. ‘수퍼 301조’를 동원해 일본 반도체 기업에 보복 관세를 부과하고, 일본 반도체 몰락을 촉발한 ‘미·일 반도체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자 일본 정부의 반도체 지원 2.0이 나왔다. 200억엔 규모의 차세대 기술 공동 개발 등 대규모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그런데 역효과가 났다. 기업 경영 효율화에 방해가 된 것이다. 일본 정부가 출범시킨 엘피다메모리는 2012년 파산했고, 도시바는 누적 적자를 못 이겨 2017년 반도체 사업 부문을 SK가 포함된 해외 사모펀드 컨소시엄에 매각했다.

▶일본 정부는 과거 실패를 거울 삼아 반도체 지원 3.0을 들고나왔다. ‘일본 기업만’이란 배타성을 버리고 미국 마이크론, 대만 TSMC, 한국 삼성전자에 보조금을 지급하며 일본으로 유치하고 있다. 또 일본의 강점인 소재·장비에 주력한다고 한다. 정부가 반도체 소재 ‘포토레지스트’ 세계 1위 업체를 인수해 육성하고 전략 물자로 활용한다는 것도 이 일환이다.

▶일본 정부의 세 번째 반도체 지원이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비용·수율·공정 문제로 20년 전 포기했던 반도체 양산이 이제 와서 정부가 지원한다고 가능할지 미심쩍어하는 시각도 있다. 일본의 ‘기술 고집’ 문화가 반도체엔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시장이 무섭게 변하는데 ‘수십 년 고장 안 나는 반도체’로는 버틸 수 없다. 다만 미·중 경쟁이 일본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은 사실이다. 반도체 소재와 장비 부문에 대한 우위가 확고하다는 강점도 있다. 일본 반도체의 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