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튀르키예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가 쓴 장편 ‘눈’은 히잡을 벗기려는 세속주의 정부와 종교적 전통을 지키려는 무슬림의 충돌을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은 여학교에서 히잡을 못 쓰게 하는 교장 지시에 반발해 소녀가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에 나선다. 알고 보니 이 소녀는 이슬람식 조혼을 강요받고 반발해 죽었다. 그걸 마을의 무슬림들이 국가의 히잡 금지 때문에 죽었다고 조작했다. 무슬림 악습 탓에 목숨을 버린 소녀가 순교자로 둔갑한 것이다. 작가는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현실을 그렸다”고 했다.

▶지금도 이런 여성 억압이 이슬람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다. 탈레반이 재집권한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선 얼굴을 제대로 가리지 않고 길을 걷던 여성이 탈레반 남자들에게 붙잡혀 즉결 처형을 당했다. 유튜브로 이 장면을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이란에서도 히잡을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 경찰에 검거된 20대 여성이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성폭행을 당한 피해 여성이 오히려 가족 손에 죽는 명예 살인도 여전히 남아 있다.

▶종교에 짓눌려 살아온 무슬림 여성들에게 한국이 숨통을 트는 문화적 해방구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젊은 여성이 히잡을 쓰고 서울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이들은 부모 아닌 또래들과 방한하는 경우도 많다. 한국관광공사 2020년 자료를 보니 가족·친척과의 방한은 58%였고, 나머지는 혼자 여행하거나 친구·동료와 동행했다. 서울관광재단에 따르면 이슬람 국가의 한국 방문자 중 20~30대 여성은 2021년 8%에서 2022년 17%로 급증했다. 올해는 6월 말 현재 21%다. 많은 중동 국가에서 여성 외출은 남성이 동행해야 가능한 현실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동남아 이슬람 국가에서 온 관광객이 대부분이었던 코로나 이전과 달리 요즘엔 넷 중 한 명은 여성 억압이 심한 사우디와 이란 등 중동 출신이다. 서구 젊은이들처럼 K팝과 K뷰티, 넷플릭스 드라마에 매료돼 한국을 찾는다. 가족 단위로 여행 오는 이들도 대개 딸들이 한국행을 조른 경우고, 국내 여행 동선도 그들이 짠다.

▶서울처럼 밤 11시 넘어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는 세계 대도시는 흔치 않다. 젊은 외국인 여성이 심야에 한강변을 산책하는 모습을 한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친구들이 걱정하자 “여기는 서울이야!” 했더니 안심하더라는 얘기도 있다. 히잡 소녀들이 자기 나라에서도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와 젊음을 누리는 날이 오기 바란다. 40년 전 테헤란과 카불에선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성이 거리를 활보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