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박상훈

프로야구 LG 트윈스는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해 창단하자마자 우승했고, 4년 뒤에 또 우승하며 명문 구단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그 뒤 팬들에겐 인고의 세월이 이어졌다. 6668587667. 2003~2012년 LG의 시즌 순위를 연결한 숫자로, 길었던 암흑기를 상징한다. ‘엘린이(LG 어린이팬)’ 출신인 LG 주장 오지환은 고교생이던 2008년 소셜미디어에 썼다. “오늘도 LG가 어김없이 졌다. 8연패인가? 꼴찌로 내려갔다. 잘해야 할 텐데.”

▶2018년엔 ‘잠실 라이벌’ 두산에 1승15패를 당했다. 그래도 팬들은 고집스럽게 “무적 LG”를 외쳤다. “이번엔 가을 야구 기대하셔도 좋다”는 선수와 감독 말을 믿어보면서, 쌀쌀해지면 입는 ‘유광 잠바’를 우르르 구입했다가 장롱에서 꺼내보지 못한 채 또 한 해를 보내곤 했다. 포스트시즌 진출을 상징하는 번쩍거리는 잠바는 연민의 대상이 됐다. “남자친구가 LG 팬이라면 믿어도 좋다. 인내심이 강하고 우직한 성품이 분명하기 때문”이라는 농담이 돌았다.

▶2019년부터 LG는 5년 연속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다. 성적이 오르자 숨어있던 ‘샤이(shy) 팬’들까지 몰려들었다. LG는 2019년 국내 프로 스포츠 최초로 누적 관중 3000만명을 돌파했다.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한 올해는 120만명을 넘어섰다. 100만명 이상이 찾은 시즌은 올해가 15번째로, 국내 프로 스포츠 최다 기록이다. LG와 KT가 맞붙은 한국시리즈는 예매 대란이 벌어졌다. LG 팬들은 상대팀 응원석까지 점령해 노란 수건을 흔들며 쌓인 ‘울분’을 터뜨렸다.

▶30여 년간 응원해온 골수팬 중엔 50~60대 이상도 많다. 이들이 온라인 예매에 어려움을 겪자 자녀들이 나서 표를 구해주고 함께 경기장을 찾기도 했다. 다들 유광 잠바를 챙겨 입었다.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은 서울 종로 한 주점에 모였다. LG 팬인 주인이 LG 관련 사진과 물건으로 가득 채워 박물관처럼 꾸민 공간으로, 이곳마저 경기 몇 시간 전부터 자리가 꽉 차 발걸음을 돌린 이가 많았다.

▶LG는 마침내 팬들의 29년 한을 풀어줬다. 그토록 마음 졸이고 실망한 날이 많았건만 팬들은 “선수들이 고맙고 야구가 삶의 희망”이라며 눈물 흘렸다. 염경엽 감독은 “우리는 이제 시작이다. 내년에도 우승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이 모습을 부럽게 바라본 이들이 있었으니, 각각 31년과 24년째 우승을 기다려온 롯데와 한화 팬들이었다.

최수현 논설위원·스포츠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