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1980년대 대학생 시절, 운동권 학생 조직인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집회에 참석했다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을 들었다. 단상의 사회자가 외쳤다. “전대협 의장님께서 입장하십니다.” 같은 학생인데 극존칭으로 부르는 게 거슬렸다. 몇 해 후 다른 대학에서 열린 전대협 집회엔 의장이 가마를 타고 행사장에 들어섰다. 임금님 행차를 보는 듯했다.

▶전대협이 학생운동을 이끌던 1980년대 말~90년대 초 운동권엔 ‘운동권 의전(儀典)’이란 게 있었다. 학생 조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극존칭과 현란한 무대로 의장의 권위를 높였다. 이를 담당하던 곳은 전대협 사무국이었다. 의장이 들어오는 입구에 ‘문선대(문화선전대)’가 횃불을 들고 도열하거나 무대에서 ‘의장님을 우러러보네’ 같은 찬양가를 불렀다. 의장 출현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행사를 일부러 밤에 열기도 했다. 이런 전대협 사무국 출신 중엔 지난 정부 청와대 의전을 담당한 이도 있다.

▶전대협 의장 선출을 위한 대의원 총회장은 개인 숭배장을 방불케 했다. 각 후보 진영은 ‘의장님과 함께라면 죽음조차 감미롭다’ 같은 구호를 외치거나 ‘의장님을 어떠한 자세로 옹립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총회장엔 사수대라는 의장 경호 조직이 배치됐다. 의장이 선출되면 ‘의장님이 시키면 따르겠습니다’라는 충성 맹세를 하고 ‘의장님의 영도 따라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힘차게 안아오자’는 북한식 어투를 썼다. 민주 국가의 어떤 조직이 이런 식의 선거를 하나 싶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저서에서 운동권의 주축인 NL 주사파가 북한의 수령 체제를 흉내 내 전대협 의장을 숭배한다고 꼬집기도 했다.

▶전대협의 실질적 배후였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를 보필했던 당시 의전비서가 책을 내고 지사 시절 그의 제왕적 행태를 공개했다. 안 전 지사가 ‘철옹성 같은 의전’을 원했다는 것이다. 수행 비서가 공관 경비 근무자에게 퇴근한 지사의 예상 도착 시각을 알려주면 공관 근무자는 미리 대문을 열어 놓고 정자세로 경례하며 영접했다. 예방접종도 간호사를 집무실로 불러 맞았다고 했다. 매사 왕처럼 살다 보니 성폭행 피해자에게도 “괘념치 말거라”라고 했을 것이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운동권 의전 마인드가 빚는 정치권의 퇴행을 ‘봉건적 습속이 낳은 문화 지체’라고 설명했다. 민주화 운동권 출신 정치인 중에 ‘후레자식’ ‘감히’처럼 왕조 시대 상전이 아랫사람 나무랄 때나 하던 말을 쓰는 이가 있는 걸 보면 운동권의 권위적인 의전 마인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