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2월 16일 청와대에서 소총·박격포 시제품 전시회가 열렸다. 시제품을 가져온 국방과학연구소(ADD) 연구진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작업복은 기름과 땀에 절었고 고약한 냄새까지 풍겼다. 4주 동안 집에 못 가고 무기 개발에 매달리느라 면도, 이발, 목욕, 세탁을 못 했다. 구상회 박사는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꼴”이라고 회고했다. 대통령은 개의치 않았다. “금년도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환호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ADD를 세운 건 자주국방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1971년 11월 ADD에 소총과 박격포 국산화를 지시하며 “연말까지 시제품을 보고 싶다”고 했다. 소총 한 자루 만들어본 적 없는 ADD에 날벼락이었다. 미군 무기를 분해해 역설계한 도면을 들고 청계천에 가 부품을 하나하나 만들어야 했다. 박 대통령은 ADD를 수시로 찾았다. 나라는 가난했지만 연구진에겐 파격적 보수와 고급 관사를 제공했다. 해외 유수의 대학·연구소에서 모여든 두뇌들은 고생을 마다 않고 헌신적으로 일했다. 과로, 무기 폭발 사고 등으로 순직한 직원도 많다.
▶애국심과 헌신이 넘쳤던 ADD 출신들은 자긍심도 남달랐던 것 같다. ADD 창립 멤버인 재미교포 강춘강씨가 평생 모은 연금저축 100만달러 전액을 ADD에 기부한 사연이 본지에 소개됐다. ‘나라에 보탬이 되자’는 생각으로 1970년 ADD 창립과 함께 합류한 강씨는 신응균 초대 소장의 비서로 일했다. 1972년 퇴직 후 미국에 정착한 그는 80세가 되고 얼마 전 유언장을 쓰다가 기부 결심을 굳혔다. 한국 무기들이 전 세계 방산 시장을 휩쓴다는 소식에 애국심이 차올랐다고 한다.
▶방위산업의 기반은 중화학공업이다. 박 대통령이 ADD보다 4년 앞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세운 이유기도 하다. 미국이 1000만달러 원조를 제안하자 KIST를 세워달라고 역제안했다. 과학계에선 “장영실 뒤엔 세종이, KIST 뒤엔 박정희가 있다”고 했다.
▶57년간 KIST는 생명공학연구소·전자통신연구원 등 전문 연구소 16곳을 분가시켰고, 석·박사급 과학 인재 4000여 명을 길러냈다. 포항제철, 현대조선의 밑그림을 그린 것도 KIST다. 1980년대 삼보컴퓨터를 창업한 이용태 전 회장을 비롯해 기업인도 다수 배출했다. KIST 직원들도 2012년부터 ‘월급 1% 기부’로 돈을 모아 공익 재단을 설립했다. 직원의 60%가 동참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경제 기적은 이렇게 이름 없이 헌신해 온 분들 덕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