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후반 서울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학과는 어디였을까. 잠사학과와 광산학과였다. 서울대 경제학과 59학번인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이 인터뷰에서 한 얘기다. 누에를 길러 실크 원단을 만들고 연구하는 잠사학과는 그나마 천연섬유학과를 거쳐 바이오시스템·소재학부로 남아있지만 광산학과는 흔적을 찾기도 어렵다.
▶입시 전문 업체 진학사가 분석한 1964학년도 서울대 학과별 예상 합격 점수를 보면 자연 계열의 경우 약학과가 가장 높았다. 취업 잘되는 ‘전·화·기’(전자·전기공학과, 화학공학과, 기계공학과)가 그다음이었다. 의예과는 공대 중위권 학과와 비슷한 수준이어서 10위권 이내에 들지 못했다. 지금은 전국 의대를 다 채운 다음 서울대 공대 등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상식처럼 돼 있지만, 80년대 중반까지도 그렇지 않았다. 지방 의대는 물론 웬만한 수도권 의대도 반에서 공부 좀 하는 정도면 갈 수 있는 학과였다.
▶의예과 인기가 급상승한 것은 90년대 이후였다. IMF 위기를 겪으며 대량 실업 사태를 목격하고 졸업 후 안정적으로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이 학과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 바람이 점차 거세져 요즘은 가히 ‘의대 광풍’이다. 특히 정부가 올해 입시부터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기로 하자 ‘N수생’이 급증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학원가에 대입 수험생은 물론 의대 입시에 관심있는 대학 재학생과 젊은 직장인의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입시 학원들이 직장인을 위한 야간반 개설까지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일단 의사를 충분히 배출하면 위기에 처한 지역·필수의료 분야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것은 틀림없다. 공급이 약간 넘쳐야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세상 이치다. 2009년 25개 로스쿨이 개교하면서 매년 1700명 안팎의 변호사를 배출하자 변호사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국민이 보다 폭넓은 법률 서비스를 이용하는 셈이다. 의대 정원 확대라는 정부 방침에 따라 급작스레 인생 항로를 재조정하려는 N수생들도 지금의 선택을 먼 훗날 어떻게 되돌아보게 될지 모른다.
▶60~90년대 우리나라 인기 학과는 10년 주기로 달라졌다. 60년대엔 최고의 엘리트가 화학공학과에 갔고 70년대는 기계공학과, 80년대는 전자공학과에 갔다. 이들이 사회에 진출하면 관련 산업이 우리나라 중심 산업으로 발전하는 패턴을 보였다. 이번에 늘어난 의대생들이 필수의료 문제 해결을 넘어 우리나라 의료·바이오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