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기자가 중학생이던 1990년대 중반,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면 달려가던 곳이 서울 용산전자상가였다. 부품이나 주변 기기를 살 때도, 메모리 업그레이드를 할 때도 그곳에 가면 다 해결됐다. 그런데 꼭 친구와 함께 가곤 했다. 당시 그곳은 ‘용던(용산전자상가 던전)’으로 불렸다. 인기 게임 ‘던전’ 속의 지하 감옥처럼 으스스하고 복잡한 미로에 길을 잃기 십상이란 뜻이었다. ‘용팔이’라 불리는 호객꾼들도 악명 높았다. 호객에 당하지 않도록 컴퓨터를 잘 아는 친구와 동행하는 것을 게임 용어를 빌려 ‘항마력을 높인다’고 했다.

▶주가 1000달러를 돌파한 AI(인공지능)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도 1990년대 중반 창업 초기 한국에 올 때면 자주 용산전자상가에 들렀다고 한다. 용산이 아시아 최대의 전자제품 메카이자,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IT 마니아의 성지로 군림하던 시절이었다. PC 보급과 게임의 인기, 워크맨·MP3 플레이어 유행 등에 올라타 90년대 말엔 하루 유동 인구 10만명, 연 매출 10조원을 기록할 만큼 호황을 누렸다.

▶2000년대 들어 유통 문화를 바꾼 온라인 쇼핑은 용산전자상가도 쇠락의 길로 몰았다. 온라인으로 IT 제품 가격을 쉽게 비교할 수 있게 되면서 용산전자상가를 찾는 발길이 눈에 띄게 줄었다. 상인들은 줄어드는 손님을 잡으려 도 넘는 호객 행위와 바가지 영업을 반복했다. 중고 제품을 새것인 양 파는 비양심이 악순환을 거듭하며 쇠락을 가속화시켰다. IT 제품을 잔뜩 진열했던 매장은 하나 둘씩 온라인 판매 업체의 창고로 바뀌었다.

▶일본 도쿄의 아키하바라와 중국 선전의 화창베이는 용산전자상가와 비슷하게 시작했지만 다르게 진화했다. 아키하바라는 온라인 쇼핑의 태풍이 불어오자 오타쿠(마니아) 문화로 눈을 돌렸다. 게임 캐릭터, 성인용 장난감 같은 서브컬처를 겨냥하면서 애니메이션 마니아들의 성지로 살아남았다. 글로벌 IT 제품의 짝퉁 제조지로 꼽혔던 화창베이는 부품 생산과 공급력을 무기로 로봇 산업 기지로 탈바꿈했다. 로봇에 들어가는 각양각색의 부품을 맞춤형으로 공급한다.

▶소멸 위기에 몰린 용산전자상가는 혁신 산업 기지로 변신해 부활을 모색하고 있다. 서울시는 인근 국제업무 지구와 연계해 용산을 AI·메타버스 등 신산업 거점 공간으로 재개발한다는 전략을 내놓았다. 판매·유통 일변에서 벗어나 연구개발과 서비스 기획, 글로벌 비즈니스가 이루어지는 ‘아시아의 실리콘밸리’로 조성한다는 것이다. 젠슨 황이 한국에 오면 다시 용산을 찾는 미래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