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HD현대중공업 노조가 올해 임금 및 단체협약에 ‘승진 거부권’을 요구 조건에 넣었다고 한다. ‘승진 거부권’이란 승진해서 노조를 탈퇴해야 하는 직급이 될 때 승진을 거부하고 노조원으로 남아있을 수 있게 선택권을 달라는 것이다. 정년을 보장받는 노조원으로 회사를 오래 다니겠다는 의도다.

▶국내에서도 인기를 끈 일본 만화영화 ‘짱구는 못 말려’에서 주인공 5세아 짱구의 아빠는 중견 기업의 만년 계장이다. 직장생활 15년 차인데 과장 승진도 못 하고 계장에 머물러 있다. 1990년대 초반에 등장한 이 만화영화는 일본 경제 거품이 꺼지면서 ‘만년 과장’이 늘고, 승진보다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상을 반영하면서 공감을 얻었다. ‘잃어버린 30년’의 장기 불황을 겪으면서 일본 기업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좁아진 승진 기회에, ‘만년 과장’으로 사는 아빠들이 대폭 늘었다.

▶공기업 한국전력에서는 승진 시험을 치르지 않고 만년 과장으로 퇴직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한다. 승진 시험에 합격하면 ‘차장’으로 승진해 대략 2년마다 전국의 지사를 옮겨다니는 순환 근무를 해야 한다. 차장이 된 후 부장으로 승진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럴 바에야 가족과 떨어져 지내지 않아도 되는 만년 과장이 낫다는 것이다. 자발적 ‘승진 거부’다.

▶100대 기업에서 임원이 될 경쟁률은 120대1에 달한다. 상위 253개 기업의 임원 평균 나이는 53.2세. 서른 즈음에 입사해 100여 명 동기와의 경쟁을 뚫고 성공하면 53세에 임원이 된다는 얘기다. 임원은 ‘샐러리맨의 별’로 불렸는데 요즘은 ‘임시 직원의 줄인 말’이라는 자조가 확산되고 있다. 임원은 정년 보장이 안 되는 계약직이다. 근로기준법상 주 52시간 근무제 적용 대상도 아니다. 법 개정으로 2016년 정년이 55세에서 60세로 높아졌는데 임원의 평균 연령은 10년 새 1.5세만 높아졌다. 임원은 길어야 50대 중반, 빠르면 40대에도 회사를 떠난다. 정년 채우면서 회사에 오래 남아있는 것이 금전적으로 더 이득일 수 있다.

▶중장년 세대는 고령화 시대에 ‘가늘고 길게’ 회사를 다니려고 승진보다 ‘60세 정년’을 선호한다. 한 구직사이트 조사에 따르면 20~30대 직원은 절반 넘게(55%) ‘승진 생각 없다’고 했다. 기업이 직원에게 써온 대표적 ‘당근’이 승진인데 요즘 젊은 세대엔 그 효과가 점점 떨어진다. 변화한 세태와 가치관에, 기업들의 인사제도가 근본부터 달라져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