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일본 기후현 히다후루카와역은 하루 이용객 400명이 안 되는 시골역이다. 그런데 2017년 한국에서만 370만명이 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이후 한국과 대만 여행객들이 찾기 시작했다. 영화에 나온 역사(驛舍), 식당,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영화 장면과 자신이 찍은 사진을 비교하는 ‘인증샷’도 남긴다. 한 식당에는 “순례(巡禮)의 감상을 노트에 남겨보라’라는 문구와 영화 포스터가 걸려 있다.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를 찾아다니는 문화를 마니아들은 ‘성지순례’라고 한다.

▶만화 ‘슬램덩크’ 팬에게 가나가와현 가마쿠라도 성지다. 가마쿠라 시대의 문화유산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슬램덩크가 이곳 문화유산이 됐다. 북산고 농구 선수들이 타고 다니던 ‘에노덴’이라는 낡은 전차를 타보고 강백호와 서태웅이 달린 에노시마 해변을 거닐며 추억에 잠긴다. 만화에 나온 전차 건널목은 해외 관광객들의 과잉 ‘인증샷’ 때문에 안전 경고장까지 붙었다.

▶대통령을 포함해 중장년층을 ‘먹방’계로 이끈 일본 TV 프로그램 ‘고독한 미식가’의 식당들도 한국 관광객의 성지순례 장소다. 변두리 허름한 식당까지 한국 관광객들이 줄을 섰다. 주인공이 한국서 촬영한 부산과 전주의 낙곱새, 청국장 가게도 화제다. 이 정도는 아저씨들도 이해 가능한 분야다. 하지만, ‘러브라이브’ ‘최애의 아이’처럼 소녀 아이돌이 등장하는 만화에 이르면 순례가 어려워진다.

▶작년 남이섬에서는 일본인 60여 명이 참가한 ‘한국 여행’ 퀴즈 대회가 열렸다. 남이섬은 2003년 일본서 방영돼 신드롬을 일으킨 드라마 ‘겨울 연가’ 촬영지다. ‘한류 20주년’을 기념해 열린 이 퀴즈 대회에는 K팝, 음식, 드라마, 관광지 등의 20주제의 문제가 나왔다. 1위를 한 50대 일본 여성은 10년 전 한국을 처음 방문해, 이번이 39번째 방문이었다고 한다. 욘사마 팬으로 시작해 지금은 방탄소년단(BTS) 팬클럽인 아미가 됐다.

▶BTS와 뉴진스 한류로 일본인들의 한국 성지순례도 급증했다. 걸그룹 마니아였던 한국 대학생은 외국인 상대 ‘성지순례’ 여행사를 창업했다. BTS 투어에는 월드컵대교, 학동공원, 멤버들이 다녔다는 식당까지 포함됐다. 최근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 ‘눈물의 여왕’ 투어까지 있다. 수원 화성, 용산의 야구 연습장, 충북 괴산 새마을회관이 코스였다. 일본 참가자는 “가는 곳마다 흥분을 억누르기 어려웠다”는 댓글을 남겼다. 일본 산골부터 한국 새마을회관까지, 두 나라 여행객들의 성지순례는 확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