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 직장인이 꼭 들어야 할 금융 상품이 있었다. 목돈 마련용 재형저축, 내 집 마련용 청약 통장이다. 정부는 청약 통장 가입자들이 낸 돈으로 주택도시기금을 조성, 공공 주택을 지어 공급했다. 1977년 만들어진 주택 청약 제도는 돈 없는 후진국 정부가 대규모 주택을 공급할 수 있었던 묘책으로 여겨졌다.
▶외환 위기 이후 주택은행이 독점해 온 청약 통장 판매가 2000년부터 전 은행으로 확대됐다. 1999년 160만명이던 청약 통장 가입자가 2500만명으로 불어났다. 당첨 확률이 낮다는 불평이 높아지자, 정부는 2007년 ‘청약 가점제’를 도입했다. 무주택 기간(32점) 부양가족 수(35점), 저축 가입 기간(17점)별로 점수를 매겨 합산 점수(총점 84점)가 높은 순으로 당첨자를 정하는 방식이다. 무주택·통장 가입 기간 각 15년 이상, 부양가족은 6인 이상이어야 만점을 받을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85㎡ 이하 아파트는 100% 가점제로 공급하고 강도 높은 분양가 상한제를 시행하자, 새 아파트 당첨이 ‘로또’에 비유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서울 강남권을 중심으로 만점 청약자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투기 지역, 분양가 상한제 적용 지역에선 대출받기도 어려워 ‘10억원대 현금을 가진 사람만 안심하고 청약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결국 ‘7인 대가족 현금 부자가 15년 이상 무주택자로 살아야’ 만점 당첨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아파트 당첨 실익이 크다 보니 온갖 꼼수가 판을 친다. 1980년대 6회 이상 떨어진 사람에겐 우선 당첨권을 주는 ‘0순위 통장’이 등장하자, 0순위 통장 불법 거래가 성행했다. 2008년엔 ‘허위 입양’하는 수법으로 자녀 수를 3명 이상으로 불린 당첨자가 대거 적발됐다. 2년 전엔 외손녀가 장애인 외할머니를 위장 전입시켜 ‘노부모 부양자’ 자격으로, 그다음엔 딸이 모친을 부양하는 것으로 꾸며 ‘장애인 특별 공급’ 아파트를 각각 분양받은 사례가 적발됐다. 부부가 위장 이혼을 통해 ‘한 부모 가족’을 만든 다음 각각 청약하는 사례도 매년 수십 건씩 적발된다.
▶‘당첨만 되면 차익 20억원’으로 화제를 모았던 서울 반포동 래미안 원펜타스 당첨자 292명 중 50명이 계약을 포기했다. 정부가 당첨자 모두에게 자격 조사를 하겠다고 하자 꼼수 당첨자들이 포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부정 청약이 드러나면 3년 이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아파트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돈 버는 물건이 돼 버린 나라에서 벌어지는 씁쓸한 백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