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워싱턴 특파원 시절, 어린이집에 다녀온 아이가 물었다. “아빠와 나는 ‘패밀리 네임(Family name)’이 같은데 왜 엄마만 달라?” 같은 가족인데 왜 성(姓)이 다르냐는 것이다. 미국에는 결혼 후 남편 성을 쓰는 여성이 많지만, 한국은 다르다고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여성이 남편 성을 따르는 제도는 여성의 재산과 수입을 남성에게 종속시킨 중세 영국의 관습법 영향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권리가 남편에게 ‘양도’된다는 점을 확실히 하려는 제도다. 서구 국가 중 영미법권인 영국과 미국은 기혼 여성 10명 중 8~9명이 남편 성으로 변경하지만, 스페인을 포함한 라틴 문화권과 이탈리아 여성들은 자기 성을 유지한다. 아랍 여성들도 성을 바꾸지 않는다. 이들의 성은 ‘빈(~의 아들), ‘빈트(~의 딸)’로 시작한다. 사우디 공주인 리마 빈트 반다르 알사우드 주미 사우디 대사의 이름은 ‘사우드 가문 반다르의 딸 리마’란 뜻이다. 이런 곳에서 성은 ‘혈통’의 표현이므로, 남편 성으로 바꿀 수 없다. 한국, 중국, 베트남 등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미국의 퓨리서치 센터 조사에 따르면 미국 기혼 여성의 14%만 결혼 후에도 자기 성을 유지했지만, 석사 이상 학위 소지 여성은 그 비율이 26%로 높다고 한다. 여성의 지위가 높을수록 성을 유지하는 경향은 예전부터 있었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평생 자기 성을 썼다. 고(故)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은 자기 성인 ‘윈저’를 자녀들에게 물려줬다.

▶보령제약 김정균(39) 사장은 창업주 김승호(92) 명예회장의 외손자다. 김 명예회장의 장녀인 김은선(66) 회장이 남편과 사별한 후, 그 아들인 김 사장이 어머니의 성인 ‘김’씨로 개명해 회사를 물려받았다. 2008년 민법 개정으로 혼인신고 시 남편과 아내 중 누구 성을 자녀에게 물려줄 것인지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어머니 성을 쓰는 일이 좀 더 보편적이 된다면, 이처럼 딸과 외손주가 기업을 물려받는 일이 더 많아질 수도 있다.

▶일본 차기 총리를 정하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한 고이즈미 신지로(43) 전 환경상이 결혼 후에도 각자의 성을 유지하는 ‘선택적 부부별성(夫婦別姓)’에 찬성했다가 지지율 하락을 겪고 있다. 일본은 무조건 부부 한 쪽의 성을 따르도록 하는 ‘강제적 부부동성’을 택하고 있다. 서구에 대한 동경이 강했던 메이지 시대 민법에 넣은 조항이라는데, 이제는 서구보다 더 강력하게 이를 고수하고 있어 묘한 느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