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하경

춘추시대 천자가 다스리는 주(周)나라를 만승지국(萬乘之國)이라 했다. 말이 끄는 전차[乘] 1만대를 보유한 나라라는 뜻이다. 군마(軍馬)의 수가 국력의 척도였다. 한무제(漢武帝)도 흉노와의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당시 최고 군마인 중앙아시아 한혈마(汗血馬)를 원했다. 마침내 한혈마 3000마리를 손에 넣고는 “모든 오랑캐가 복종하네”라며 기뻐했다. 여포와 관우가 탔던 적토마도 한혈마였다고 한다.

▶군마는 지구력과 주력을 갖춰야 한다. 한혈마는 기병을 태우고 폭 360㎞ 중앙아시아 카라쿰 사막을 물 한 방울 마시지 않고 사흘 만에 주파한다. 유럽에선 데스트리어, 코서, 라운시 등 3종을 꼽는데, 중세 기사들은 그중에서도 빠르게 돌격하는 데스트리어를 으뜸으로 쳤다. 눈 덮인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을 그린 화가 다비드의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에 등장하는 백마는 용맹하기로 유명한 이집트산 마렝고다.

▶1·2차 대전까지 군마는 전쟁 수행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철도로 군수품 대량 수송이 가능해진 1차 대전 때는 군용 화물을 역에서 최전방까지 나르는 말의 역할이 더 커졌다. 영국과 프랑스 군마 900만필이 임무 수행 중 전사했다. 지금도 도로가 없거나 산악 지형인 곳에선 말에 의지한다. 눈이 오면 거대한 진창이 되는 우크라이나 평원 전쟁터에선 말 달구지가 무기와 식량을 나른다.

▶수많은 전쟁터에서 말은 인간과 생사를 함께하는 전우였다. 동방 원정에 나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전장을 함께 누빈 군마 부케팔로스가 인더스강 근처에서 전사하자 말의 이름을 딴 도시를 세워 전공을 기렸다.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은 자신을 등에 태우고 왜구와의 전쟁터에 나갔다가 화살 세 발을 맞고 부상한 말을 특히 아꼈다. 그 말이 죽자 무덤을 쓰고 돌 구유를 만들어 부장품으로 넣었다.

▶6·25 전쟁 중 미 해병대 소속으로 적의 포격을 뚫고 탄약과 부상자를 날랐던 한국산 군마 레클리스의 동상 제막식이 그제 제주에서 열렸다. 레클리스(reckless)는 무모할 정도로 용맹하다는 의미다. 미군은 레클리스를 전쟁 영웅으로 예우했다. 군마로선 미 해병대 역사상 처음으로 하사 계급을 달아줬고, 죽은 뒤엔 해병대 기지에 안장했다. 레클리스가 머물렀던 축사엔 전공을 기리는 기념비도 세웠다. 라이프지(誌)는 레클리스를 워싱턴, 링컨 등과 함께 미국 100대 영웅으로 꼽기도 했다. 전쟁에서 희생한 이들을 기억하고 예우하지 않는 나라가 오래 존속할 수는 없다. 그것이 사람 아닌 말이라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