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잎새’로 잘 알려진 미국 소설가 오 헨리는 1896년 중앙아메리카의 온두라스에서 반년 정도 살았다. 온두라스 산업은 바나나 농장이 거의 전부였다. 잘 살려면 공업도 함께 일으켜야 했지만 다국적 농산물 회사와 결탁한 정치인들이 이를 막았다. 정정도 몹시 불안했다. 1838년 독립하고 반세기 뒤 오 헨리가 방문할 때까지 수백 건의 쿠데타와 정권 교체를 겪었다. 미국에 돌아온 오 헨리는 단편집 ‘양배추와 왕들’에 이 이야기를 쓰면서 온두라스를 ‘바나나 공화국’이라 불렀다.
▶그 후 바나나 공화국은 한두 가지 농산물이나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느라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정치는 부패한 나라를 멸시하는 표현으로 굳어졌다. 처음엔 온두라스 등 중남미의 가난한 독재국가들을 지칭했다. 하지만 부패 스캔들이나 정치적 추문이 터진 선진국에서도 자괴감을 표현하는 것으로 쓰임이 확대되고 있다.
▶미국에선 트럼프가 대선에서 패배한 이듬해인 2021년 미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이 터지자 “여기가 바나나 공화국이냐”는 탄식이 쏟아졌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바나나 공화국에서 선거를 논쟁하는 방식”이라 지적했고 트럼프의 최측근이었던 마이크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마저 “바나나 공화국에선 군중의 폭력이 권력 행사를 결정한다”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권영세 의원이 1일 라디오에 출연해 한국 정치를 바나나 공화국에 빗댔다. 방송 진행자가 “조국혁신당이 탄핵 초안을 쓰고 있다”고 하자 권 의원은 “탄핵이 돼서는 안 될 사안들이 탄핵을 해서 공무원 직무는 정지되지만 실제로는 각하도 되고 기각이 된다”며 “이런 부분들은 우리 정치가 어디 바나나 공화국 정치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툭하면 탄핵으로 대통령을 끌어내리려는 풍조가 의사당 폭동으로 권력을 지키려 했던 트럼프 방식과 닮았다는 비유인 듯하다.
▶국가 이미지는 한 번 굳어지면 개선하기 어렵다. 7세기 당나라가 중국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강한 군사력이었다. 그러나 이후 토번 등과 싸울 때 연전연패하자 ‘당나라 군대’가 오합지졸의 대명사처럼 쓰이기도 했다. 온두라스도 정치가 안정되고 부강해졌다면 바나나 공화국 이미지를 일찌감치 벗어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직전 대통령조차 마약 유통에 간여한 게 들통나 올해 수감됐으니 ‘도로 바나나 공화국’이다. 한국은 사회 각 분야에서 K자를 이마에 붙이고 질주하는 나라가 됐다. 그런데 정치만큼은 후진 기어 넣고 달리며 ‘바나나 공화국’ 멸칭까지 상륙시키는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