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 20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140명을 사면했다. 임기 종료를 약 2시간 앞두고 발표된 사면이었다. 그중엔 마약 밀매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이부 남동생 로저가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논란이 된 것은 부유한 기업인 마크 리치에 대한 사면이었다. 리치는 4800만달러의 탈세 혐의 등으로 기소된 1983년 스위스로 도피해,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과 함께 연방수사국(FBI)의 ‘10대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 리치의 아내가 클린턴 도서관 건립 재단 등에 거액을 기부한 사실이 알려지자 “사법정의가 매수당했다”고 여론이 들끓었다.
▶미국 대통령의 사면권은 영국 국왕의 은사권(恩赦權)을 본떠 만든 것이다. ‘제왕적 특권’을 거부했던 미국 건국의 주역들도 은사권만큼은 국가를 통합하는 순기능이 있다고 생각해 헌법에 반영했다. 링컨 대통령은 1862년 백인과 무력 충돌한 인디언 303명이 교수형 판결을 받자, 판결문을 일일이 읽어보고 265명을 사면했다. 백인을 공격한 이들을 엄벌하라는 정치적 압박에도 링컨은 “선거를 위해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고 했다.
▶세월과 함께 사면의 취지도 변질됐다. 1974년 9월 8일,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전임자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대한 “절대적 사면”을 발표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 위기에 몰린 닉슨이 사임하고, 부통령이었던 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한 지 한 달 만이었다. 포드는 국론 분열을 끝내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대통령이 되는 대가로 사면을 약속해준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퇴임 한 달 전인 1992년 12월 ‘이란-콘트라 스캔들’에 연루된 인물들을 전격 사면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일어나 당시 부통령을 지낸 부시도 책임이 있는 스캔들이었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도 첫 임기 막바지인 2020년 12월, 측근 26명을 무더기 사면했다. 그중에는 트럼프에 거액 기부를 했으나 탈세와 위증 등으로 실형을 살았던 사돈 찰스 쿠슈너가 포함돼 있었다. 당시 트럼프는 사상 최초로 자기 자신을 사면하기 위한 법률 검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트럼프는 찰스 쿠슈너를 주프랑스 미국대사로 지명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탈세와 불법 총기 소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차남 헌터를 사면했다. 자녀를 사면한 것은 바이든이 처음이다. 그동안 “사법 절차를 존중하겠다”며 헌터를 사면할 계획이 없다던 바이든인데, 대선이 끝나자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