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성규

1941년 12월 7일 일본 정부가 주미 일본 대사관으로 보낸 암호 전문을 미군 무선정보국이 잡아챘다. 미군이 풀어낸 암호는 ‘미 국무장관에게 워싱턴 시각 오후 1시까지 일본 정부 답변을 전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를 수신한 일본 대사관이 복잡한 암호를 푸는 데 쩔쩔매는 바람에 오후 2시 30분에야 미 국무부에 도착했다. 그사이 진주만은 이미 일본군 공습으로 쑥대밭이 됐고 일본은 ‘선전포고 없는 기습’의 불명예를 안고 말았다.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알파벳의 각 철자를 세 글자씩 뒤로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암호를 만들어 썼다. 예를 들어 ‘cat’이라는 단어를 이 규칙(암호 키)에 따라 ‘fdw’로 바꾸는 식이다. 이처럼 암호화할 때와 해독할 때 같은 키를 사용하는 방식을 ‘대칭 암호화’라고 한다. 오늘날 온라인 상거래에선 주로 ‘비대칭 암호화’가 사용된다. 암호화에 쓰는 키(공개 키)와 해독에 쓰는 키(개인 키)가 달라 암호를 풀려면 두 가지를 모두 알아야 한다. 암호화하려는 정보를 특정 숫자로 바꾸고 소수(素數)들의 곱과 복잡한 연산을 활용해 엄청나게 큰 수로 바꾸면, 이를 해킹해도 암호를 풀어낼 규칙을 알아내기 어렵다.

▶이보다 훨씬 고도화한 기술이 타원 곡선 위의 특정 점과 연산을 이용해 공개 키와 개인 키를 생성하는 ‘타원 곡선 암호화’다. 비트코인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비트코인이 수많은 개인의 디지털 장부에 기록돼 위·변조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암호화 기술 덕이다. 그런데 지난주 새로운 양자 칩을 탑재한 구글의 양자컴퓨터가 기존 수퍼컴퓨터로 10셉틸리언(10의 24제곱)년 걸리던 문제를 단 5분 만에 풀었다는 발표가 나오자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 화폐 가격이 많게는 20% 가까이 폭락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양자컴퓨터의 정보 단위인 큐비트는 0과 1의 상태를 동시에 가질 수 있는 확률적 중첩 상태로, 여러 상태를 동시에 계산할 수 있다. 예컨대 두 큐비트는 00, 01, 10, 11의 상태를 중첩으로 표현할 수 있어 여러 정보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다. 동전에 비유하면, 던져진 동전이 공중에서 돌고 있는 동안 앞면과 뒷면 중 하나로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양자컴퓨터는 소인수 분해 같은 문제에서 강력한 계산 능력을 갖고 있어 기존 암호 체계를 무력화할 게임 체인저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양자컴퓨터의 성능 고도화를 기대하는 이들은 가상 화폐의 암호 체계가 뚫리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본다. 반면 가상 화폐 업계는 양자컴퓨터에 뚫리지 않는 양자 내성(耐性) 암호화 기술이 개발되고 있어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뚫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양자컴퓨터와 가상 화폐의 ‘창과 방패’의 전쟁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곽수근 논설위원·테크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