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쓴 글을 베껴 쓰는 필사(筆寫)는 역사가 3000년이 넘을 만큼 오래된 일이다. 성경을 뜻하는 영어 바이블(Bible)도 필사용 파피루스가 거래되던 고대 페니키아의 항구 비블로스에서 비롯됐다. 15세기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등장하기 전까지 필사가는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로마제국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필사가를 교사로 초빙했다. 그의 저서 ‘명상록’엔 스토아 학자인 에픽테토스의 명언록을 필사해서 한 권을 갖게 됐다며 기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인쇄술 등장 이후 필사는 직업에서 거의 퇴출됐지만 필사 자체는 남았다. 불교에선 절을 하면서 한 글자씩 베껴 쓰는 일자일배(一字一拜)를 대표적인 심신 수양법으로 꼽는다. 가톨릭도 세례받는 이에게 신심을 높이기 위해 성경 필사를 하게 한다. 다산 정약용은 효과적인 공부법으로 필사를 권한다. “열흘 동안 책 100권을 베끼는 것으로 공부했다”고 했다. 뇌과학도 눈으로 읽는 것보다 손으로 쓰는 필사의 기억 효과가 크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일본의 한 뇌과학자는 필사하는 손을 ‘몸 밖의 뇌’라고 했다.
▶지난해 베스트셀러 집계에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소설 3권에 이어 필사를 다룬 책이 종합 4위에 올랐다고 한다. 독서를 멋으로 여기며 패션처럼 소비하는 최근 유행을 ‘텍스트 힙’이라고 하는데, 필사도 여기에 포함된 것으로 해석한다. 가수 출신 유명 배우가 얼마 전 TV에 출연해 “내 취미는 필사”라며 책 6권을 필사한 노트를 증거로 보여주기도 했다. 소셜미디어에서 ‘#필사’를 입력하면 수천 개 게시물이 뜬다.
▶필사가 이처럼 주목받는 배경엔 필사가 주는 치유 효과도 있다. 바쁜 일상에 쫓겨 마음의 여유를 잃거나 업무 스트레스, 불안 등에 빠졌을 때 필사를 하면 반복되는 신체 활동이 마음을 진정시킨다는 것이다. 불을 멍하니 바라볼 때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안정되는 ‘불멍’과 비슷하다고 해서 필사를 ‘글멍’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달 들어 헌법 베껴 쓰기 책이 필사 인기에 가세했다. 계엄 전과 비교하면 한 달 만에 판매량이 50배 넘게 급증한 책도 등장했다. 소설이나 시, 격언, 경전을 주로 베끼던 걸 생각하면 이례적이다. 출판계에선 계엄과 연이은 탄핵소추를 목도한 이들이 헌법을 직접 써보는 것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혼란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고 해석한다. 이런 마음을 정치인들이 미리 살폈다면 지금 같은 상황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필사용 책 인기를 지켜보는 심사가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