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인환, 남자가 남자를 만나는 곳, 2001/2020, 향가루, 620x436cm, 설치전경, 'ㄱ의 순간'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예술의전당 서예 박물관에서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이 한창이다. 2층 전시실을 다 둘러볼 즈음이면 어디선가 조심스레 흘러나온 은은한 향불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서예와 향이 잘 어울리기는 하나 미술전에서 시각보다 후각이 앞서 반응하는 건 특별한 경험이다. 게다가 수많은 작품이 전시된 공간에서 온종일 향이 타들어 가고 있다니 파격적이지 않은가.

오인환(1965~)의 ‘남자가 남자를 만나는 곳’은 눈이 시리게 선명한 청록의 향을 곱게 갈아서 바닥에 글씨를 쓰고 불을 붙인 작품이다. 불길은 글씨를 따라 타들어 가는데, 지금은 한 귀퉁이의 낱말 몇 개만 재가 됐으나, ‘ㄱ의 순간’이 폐막하는 내년 2월 말이 되면 작품 전체에 불길이 지나간 뒤라 글자 모두가 뚜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글자가 잘 보인다고 해서, 그 의미도 쉽게 드러나는 건 아니다. 작가는 제목 그대로 서울의 게이바 이름들을 향가루로 바닥에 썼다.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장소일 수 있는 이 낱말들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단어들의 무작위적 나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오인환은 이처럼 언어와 문자가 사회적 소통 도구라고 할지라도 결코 구성원 모두에게 보편적이고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개방과 진보를 내세우는 집단이더라도 그 안에는 반드시 금지되고 무시되며 억눌린 개인들과 그들의 언어가 존재하는 법이다.

작은 바람에도 흩날려 버릴 오인환의 작품은 미술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지선 하나 없이 바닥에 그대로 놓여있다. 전시가 끝나 재를 싹 쓸어버리고 나면 남는 것도 없다. 이토록 취약하고 허무한 작품의 성격은 그것이 드러내는 언어의 성질을 그대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