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병든 한 해였다. 코비드19가 우리 몸을 병들게 하듯, ‘다수의 압제’라는 열병이 대한민국을 괴롭혔다. 숫자 싸움에서 이긴 ‘다수’는 손안에 들어온 권력을 미친 듯 휘둘렀고, ‘소수’는 별다른 대처 방식을 찾지 못한 채 거칠지만 무능력한 저항을 일삼았다. 올 한 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를 고르라면 ‘이전투구(泥田鬪狗·진흙 밭에서 뒹굴며 싸우는 개)’를 택하고 싶다. 후대의 역사가는 현재 한국 정치 상황을 두고 민주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타락해 가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할 것 같다.

미국 화가 케일럽 빙엄의 그림‘카운티 선거’. 1840년대 미주리에서 활동한 빙엄은 막 정착되기 시작하던 미국 민주주의의 기괴하고 때로는 이해하기 힘든 여러 측면을 화폭에 담았다. 분주하고 번잡스러웠던 미국 민주주의의 첫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위키피디아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선거에서 이겨 정권을 장악한 여당이 자신의 정책을 마음대로 결정하는 게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민주주의는 곧 다수결이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칙을 따르고자 한다면 더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게 맞지 않는가? 그렇지만 일찍이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1805~1859)은 바로 여기에 민주주의의 맹점이 있으며, 이런 것이 결국 민주 독재(despotisme démocratique)를 초래할 위험이 크다고 보았다. 19세기 중엽에 그가 분석한 내용 중 많은 부분이 오늘날까지 관철되는 것을 보면 실로 탁월한 혜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서병훈, ‘민주주의, 밀과 토크빌' 참조).

구대륙의 귀족 출신 문필가이자 정치가인 토크빌이 신생국 미국을 직접 둘러본 결과 얻어낸 결론은 왕정이나 귀족정이 아닌 민주정이 세계사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이다. 분명 그 누구도 평등의 확산이라는 도도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조건에서 민주주의를 잘 수행한다고 해도 그것이 결코 최선의 체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문제의 근원은 평등이 자유를 억압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토크빌이 보기에 평등에는 두 종류가 있다. ‘당당하고 정당한 평등’은 평범한 사람도 위대한 사람의 대열로 끌어올려주는 힘이 있다. 반면 ‘저급한 평등’은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자기들 수준으로 끌어내리면서 정의로운 일로 미화한다. 이게 민주 사회의 고질이고, 특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병 같다. 남이 잘되는 걸 보느니 차라리 강제로라도 끌어내려 다 같이 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결국 다 함께 노예가 되는 수밖에 없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프랑스의 정치철학자이며 역사가 알렉시 토크빌(1805~1859).

이런 부류의 특징은 열정이 넘치되 성찰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스스로 독자적 판단을 내릴 능력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인정하기는 싫어한다. 이럴 때 취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다수를 따르는 것이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모이면 더 큰 지혜를 얻는다고 오해하면서 말이다. 많은 사람이 같은 의견을 공유하면 그것이 확실한 진리의 근거라고 믿는다. “국왕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과거의 주장은 이제 “다수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로 바뀌었다. 더 나아가서 다수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망상에 이른다. 쉽게 말해 다수를 이루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자기편이 아닌 자들은 오류에 빠져 있고 부도덕하다는 것이다.

진리와 도덕을 독점한 열성파 다수는 반대편을 가혹하게 압박한다. 이미 19세기에 토크빌은 이렇게 예견했다. 과거의 군주정에서는 육체에 폭력을 가했다면, 민주 공화정에서는 반대편 사람들의 영혼을 공격할 것이다. “오늘부터 당신은 우리들에게 이방인이다. 당신은 사람들 사이에 여전히 끼여서 남아 있겠지만 인간으로서의 권리들은 몽땅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당신이 동료들에게 다가가면 그들은 당신을 마치 불결한 물건처럼 피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에게 아무 죄도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마저도 자기들도 똑같은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당신을 버릴 것이다. 목숨을 살려줄 테니 조용히 사라져라. 하지만 차라리 죽느니만 못할 것이다.” 정치 견해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저주 섞인 비난을 들어본 사람은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안다.

1787년 9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진행된 미국 헌법 조인식을 그린 미국 화가 하워드 챈들러 크리스티의 그림(1940). /위키피디아

이처럼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은 정부가 ‘국민의 이름’을 내세워 권력을 행사하면 자칫 민주 독재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 과거에는 어느 군주라 하더라도 반대파를 모두 제압할 수 있을 만큼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히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것이 가능해졌다. 무엇보다 법률을 만드는 특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폭압적인 법과 제도를 민주적 방식으로 세련되게 만드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 민주주의는 무제한의 권력이 한곳에 집중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체제다. 이론상 국민이 주권자라고 하지만 우리는 단지 몇 년에 한 번 투표를 통해 우리의 주권을 행사했다고 착각할 뿐이다. 일단 권력을 넘겨주고 나면 아무런 통제 가능성이 없다.

토크빌은 무제한의 권력을 쥐는 것이 곧 타락으로 가는 첩경이라고 파악했다. 인간은 권력을 분별 있게 행사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폭주하는 권력 집단 내부에서 미약하나마 반대 목소리를 내는 순간 당사자가 얼마나 무자비하게 숙청당하는지 목도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애초에 권력을 한 사람 혹은 한 집단에 몰아주는 것은 실로 위험한 일이다. 토크빌은 누구든 무한 권능을 잡는 순간 압제를 시작한다고 보았다.

민주주의가 자유를 유린하는 이 모순을 해결할 대책은 없는가? 토크빌은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지만 아무리 봐도 속 시원한 이야기는 못 된다. 참여를 늘려 민주주의의 해독을 중화해야 하고,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잘 이해된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태도를 길러야 하며, 우리 모두 절제와 헌신의 습속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이 그런 것들이다. 하나같이 맞는 말이지만 오늘 당장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19세기에 제시한 문제에 대해 21세기 현재까지도 제대로 된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것은 당장 2021년부터 우리가 시작해야 할 과제다.

<다수의 압제>

권력이 다수에서 나온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다수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주장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이것이 토크빌이 내내 고민하던 문제다. 그렇다면 다수의 압제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토크빌이 말하는 핵심 내용은 어느 누구에게도, 그 어떤 집단에게도 전권을 몰아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토크빌, 이용재 역,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미국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석상. /위키피디아

“내가 보기에 무한 권능(toute-puissance)은 그 자체로 나쁘고 위험한 것이다. 무한 권능의 행사는 그 주체가 누구든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고 있다. 아무 통제 없이 활동하고 아무 장애 없이 군림하도록 내버려둘 정도로, 그 자체로 존중할 만하고 신성한 권위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민이든 국왕이든, 왕정이든 공화정이든, 어떤 권력체에 전능한 권리와 능력을 부여한다면, 나는 거기서 압제의 씨앗을 본다. 내가 보기에 미합중국에서 시행되는 민주주의 통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유럽에서 많은 사람이 주장하듯이 그 취약성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막강한 힘에 있다. 아메리카에서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이 나라에서 누리는 극단적인 자유가 아니라 이 나라에는 압제에 맞설 보장책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어느 개인이나 정당이 합중국에서 부당한 처우를 당한다면 누구에게 호소할 수 있겠는가? 여론에? 여론도 다수로 이루어져 있다. 입법부에? 입법부는 다수를 대표하며 맹목적으로 다수에 복종한다. 행정권에? 행정권은 다수에 의해 임명되며 다수에게 소극적 도구 구실을 한다. 공권력에? 공권력은 무장한 다수와 다름없다. 배심원에게? 배심원은 법령을 공표할 다수다. 더구나 법관들도 몇몇 주의 경우 다수에 의해 임명된다. 그러므로 당신의 심기를 해치는 그 조치들이 아무리 부당하고 불합리하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그것에 복종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을 피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입법부가 다수를 대표하면서도 다수의 변덕의 노예가 되지는 않도록 구성하고, 행정권이 자기에게 고유한 힘을 부여받고, 사법권이 다른 두 개의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고 있다면 압제의 가능성은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다.” 불행하게도 2020년 한국의 상황은 정확히 그 반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