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의미의 아시타비(我是他非)가 2020년의 사자성어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진영논리가 팽배했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니 진영논리에 갇히지 않은 ‘합리성’을 갖춘 인물은 희소 자원이 되어 간다.

얼마 전 끝난 미국 대선을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많이 뒤지던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 불복 의사를 공공연히 밝히는 사상 초유의 상황이 이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임 기간 동안 무려 네 명의 대법관을 지명한 터라 연방 대법원이 트럼프의 손을 들어 줄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우리 방송에서는 연일 소위 ‘미국 전문가’들이 출연하여 미국 현지 학자들도 생소해할 미국 선거법 관련 강연을 늘어놓았다.

김명수 대법원장(가운데)과 대법관들이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에 참석하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생후 7개월 된 딸을 홀로 방치해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부부에 대한 대법원 선고를 내린다. 2020.10.22/연합뉴스

그러나 이는 침소봉대였다. 정권 이양이 큰 차질 없이 이루어지는 분위기다. 이 기저에는 자신이 임명한 대법관들조차 자기 손을 들어주지 않으리라는 트럼프 대통령 진영의 자체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즉 누구든 대법관들이 진영논리가 아닌 법리에 근거한 판단을 할 것이라 예상할 수밖에 없는 사회 분위기, 그것이 미국의 힘이 아닐까?

한국에서도 사법부와 대법원이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미국 못지않게 진영논리가 팽배한 상황에서 마지막 보루는 사법부, 그중에서도 대법원일 수밖에 없다.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유력 정치인이 범죄자도, 잠재적 대권 주자도 될 수 있다. 국가 정책의 운명도 사법부 판단에 따라 갈리는 경우가 많다.

미국 정치에서 대법관 임명은 대통령의 성향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척도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대법관의 임명은 대통령이 한다. 필자는 최근 지난 2005년 9월부터 2020년 9월까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문 274건을 분석한 바 있다. 여기엔 전·현직 대법원장과 대법관 등 총 46명이 포함됐다. 각 사건별로 대법관들의 의견을 과반수의 다수 의견과 반대 의견, 다수 의견과 결론은 같지만 논리가 다른 별개 의견으로 분류했다.

여기에 미국 연방 대법관들의 정치적 성향을 분석할 때 가장 많이 활용되는 앤드루 마틴과 케빈 퀸이 고안한 통계 방법론을 적용하여 분석했다. 이는 유사한 판결을 많이 하는 대법관들에게 가까운 점수가 부여되도록 하는 방법론으로서 판결에 대한 연구자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는 완전히 배제된다.

대법관 46명의 판결 보수·진보 성향 분석

우선 임명권자에 따른 대법관들의 성향 차이가 분명히 드러났다<그래픽>.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 10명이 평균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성향(-0.347)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그 뒤를 이어 노무현(-0.147), 김대중(0.084), 이명박(0.104) 전 대통령 순이었다. 반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 5명이 평균적으로 가장 보수적(0.175)인 성향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들의 성향 차이가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은 문 대통령과 닮은 듯 달랐다. 노 전 대통령 대법관 임명의 키워드는 ‘다양성’이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은 김영란(-1.532), 전수안(-1.374), 박시환(-1.227), 이홍훈(-0.973) 등 진보 성향 대법관 톱 5 중 4명을 임명했지만 안대희(1.628), 김황식(1.338), 김용담(0.552) 등 보수 성향 대법관 톱 5 중 3명도 임명했다.

노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대법원장이었던 이용훈 전 대법원장(0.021)은 전체 46명 중 중간에 해당하여 가장 균형감 있는 대법관으로 볼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노 전 대통령은 진보 성향으로 분류가 불가능한 김능환(0.046/46명 중 25번째로 진보), 양승태(0.166/46명 중 28번째로 진보), 박일환 (0.460/46명 중 38번째로 진보) 등의 대법관도 임명했다. 따라서 ‘코드 임명’으로 볼 만한 대법관은 절반(10명 중 5명) 정도였다.

여기서 민심의 집합적 합리성을 엿볼 수 있다. 코드를 무시한 대법관 임명으로 사법부의 합리적 판단 및 독립성을 보장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역대 대통령 중 최고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전인 2014년 10월 한국갤럽이 실시한 조사를 보면 노 전 대통령(32%)이 산업화를 이끈 박정희 전 대통령(28%)을 2등으로 밀어내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역대 대통령”으로 꼽혔다.

반면 임명한 대법관들의 다양성이 가장 낮았던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조희대(0.468/46명 중 40번째로 진보), 이기택(0.374/46명 중 35번째로 진보) 등 보수적인 대법관들을 임명했다. 또 최근 퇴임한 권순일 대법관(-0.010)이 박 전 대통령이 임명한 가장 진보적인 대법관이었으나 전체 46명 중 중간 정도에 해당했다. 결국 코드가 맞지 않는 대법관은 한명도 임명하지 않은 셈이다.

문 대통령의 대법관 임용은 어떤 평가를 받을까?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문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들은 평균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판결 성향을 보였다. 반면 다양성 면에서는 중간 정도였다. 문 대통령은 김선수(-1.121/46명 중 4번째로 진보), 박정화(-0.934/46명 중 6번째로 진보), 김상환(-0.867/46명 중 7번째로 진보), 민유숙(-0.620/46명 중 9번째로 진보), 김명수(-0.391/46명중 13번째로 진보), 노정희(-0.347/46명 중 14번째로 진보) 대법관 등 진보 성향의 대법관들을 대거 임명했다.

그러나 소수이기는 하나 노태악(0.498/46명 중 41번째로 진보), 안철상(0.293/46명 중 32번째로 진보), 이동원(0.391/46명 중 31번째로 진보) 등 보수 또는 중도 보수 정도의 성향으로 볼 수 있는 대법관들도 임명했다. 이들이 소신 판결을 통해 문 정부 임명 대법관들의 ‘다양성’ 제고에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실제로 지난 9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법외노조 통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이동원 대법관은 다수 의견에 반대 의견을 냈고 안철상 대법관은 소수 의견으로 “전교조가 법을 위반한 것은 명백하고, 시정명령과 시정요구까지 거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교조가 해직 교원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정만으로 노동조합 법적 지위 자체를 박탈한 것은 아니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문 정부가 임명한 대법관 중 가장 보수적인 성향으로 분류된 노태악 대법관은 오히려 다수 의견에 찬성했다. 모두 소신 판결로 해석될 수 있어 보인다.

문 대통령은 최근 퇴임한 권순일 전 대법관 자리에 우리법연구회 출신 이홍구 대법관을 임명했다. 이 대법관이 세간의 우려와 달리 문 정부 임명 대법관의 ‘다양성’ 제고에 기여할지 지켜볼 일이다.

대법관들의 ‘합리성’과 ‘독립성’은 한 사회의 마지막 보루다. 또 노 전 대통령의 사례에서 보듯이 문 대통령의 역사적 평가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노 전 대통령 재임 당시 소신 판결을 한 대법관들, 그리고 그런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준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 그리고 원칙에 충실했던 임명권자가 있었기에 노 전 대통령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닐까? 대법원은 지금 역사적 시험대에 올라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