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위병 집회에서 접견식을 갖는 마오쩌둥, 1966년 10월 추정/ 공공부분>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39회>

정치는 비열한 게임이다. 정적의 제거를 위해서 권력자는 음모를 짜고 함정을 판다. 함정에 빠진 정적을 허울 좋은 법망으로 옭아맨 후에도 권력자는 한 치의 관용도 베풀 수가 없다. 권력의 시한이 다하는 순간, 죽은 정적이 산 권력을 제압하는 반전의 드라마가 허다한 까닭이다. 정적에겐 장엄한 자결도, 순교의 형틀도 허락할 수가 없다. 결국 권력자는 성난 군중을 선동해서 정적을 직접 처형케 하는 음모를 짠다. 군중의 제단에 올라간 정치의 희생물은 쉽게 부활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66년 가을부터 마오쩌둥은 원한다면 언제든 류샤오치를 손쉽게 제거할 수 있었다. 류샤오치의 정치생명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생명까지도 마오쩌둥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마오는 정치적 식물로 전락한 류의 입에 인공호흡기를 장착했다. 과연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를 시켜 그 호흡기를 뗄 것인가? 마오는 짐짓 모든 결정을 중국공산당 대중노선의 원칙에 따라 인민의 의지에 맡겼다. 홍위병을 이용한 정적의 처형은 정치적 불멸을 노린 마오의 한 수였다. 그의 한 수는 성공적이었나?

<“반도(叛徒), 내간(內奸, 내부간첩), 노동자의 적, 류샤오치 영구 출당!”/ chineseposter.net>

무서운 음모 “국가원수를 모독하라!”

1967년 7월, 중국 전역은 무장투쟁의 화염에 휩싸였다. 중국 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7월 7일 쓰촨성 충징에서 발생한 무장투쟁에서 처음으로 군용소총이 사용됐다. 7월 8일 광둥성 남단에선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한 300여명의 무력집단이 국경선을 넘어 홍콩으로 침입한 후, 샤타우콕(沙頭角) 경찰서를 습격해 다섯 명의 경관을 사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가장 큰 사건은 그러나 우한의 무장투쟁이었다.

1967년 7월 14일 새벽 3시 반, 마오쩌둥은 우한으로 향하는 호화열차에 올랐다. 우한의 무장투쟁을 종식시켜 남방의 혼란상을 정리하는 야심찬 남순(南巡)이었는데, 그에겐 숨겨진 계획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국가원수 류샤오치를 홍위병의 집단린치에 무방비로 노출시키는 음모였다. 당시 류샤오치는 가택연금 상태에서 숨죽이며 살고 있었다.

1967년 7월 13일, 베이징 건공(建工)학원 “81전투단”은 정식으로 중공중앙의 주요기관이 밀집된 중난하이(中南海) 서문 밖에 진지를 쳤다. 그들은 류샤오치를 밖으로 불러내서 혁명적 군중집단 앞에 세워 놓고 비투(批鬪, 비판투쟁)를 연출하려 했다. 군중 시위대는 공권력의 제재를 전혀 받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베이징을 떠남으로써 이들의 투쟁에 묵언의 지지를 표명했다. 물론 마오의 남순(南巡)은 극비리에 전개됐지만, 중공중앙과 중앙문혁소조의 핵심인물들은 마오의 의도를 간파했다. 결국 류샤오치에 대한 홍위병의 공격을 방조하라는 시그널이었다. 22년 간 마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주치의 리즈수이(李志綏, 1919-1995)가 말했다. “마오가 [기차를 타고] 움직일 땐 늘 공격이 개시됐다”고.

국가원수 류샤오치의 고난

7월 14일 밤, 우한에 도착한 마오는 직접 현장에서 위태로운 무장투쟁의 광열을 실감했다. 7월 18일, 마오는 우한 군구의 사령관 천자이다오(陳再道, 1909-1993)을 불러와서 자아비판을 강요하며 우한의 무장투쟁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다.

바로 그때, 홍위병들은 중난하이 안으로 밀려들어가 류샤오치의 숙소에 난입했다. 그들은 류샤오치와 왕광메이가 연금 상태로 머물고 있던 관저를 송두리째 깨부수고 더럽혔다. 젊은 학생들의 폭력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던 류샤오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이마의 땀을 훔치려 했지만, 홍위병 한 명이 난폭하게 손수건을 낚아챘다. 증오와 분노가 뒤섞인 언어의 테러가 가해졌다.

바로 전날인 7월 17일, 중난하이 앞에 진을 친 홍위병들은 류샤오치와 그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 1921-2006)를 향해 “7월 22일까지 밖으로 나오라!”는 최후통첩을 발송했다. 건공 “81전투단”은 그날 밤 자정을 기해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그들의 선언문을 보면 류샤오치에 대한 증오가 읽힌다.

“류적(劉賊, 도적 류샤오치)은 우리들의 불구대천의 원수다······. 마오주석을 보위하고, 당중앙을 보위하고, 무산계급독재를 보위하기 위해서 우리는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머리카락도 자르지 않고, 피가 흐르도록 끝까지 단식투쟁을 할 것이다. 류적이 중난하이를 나와서 전국, 전 세계의 인민들에 타도되고 박살날 때까지 우리들은 멈추지 않으리라 맹세한다!”

7월 22일까지 시한을 제시한 홍위병들이 왜 갑자기 류샤오치의 관저에 난입했을까? 마오의 지령이 있었다고 사료된다. 1967넌 7월 18일 베이징에선 중앙문혁소조가 류샤오치와 왕광메이를 규탄하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개최했다. 수십만 명의 군중이 밖에서 “류샤오치 타도!”를 외칠 때,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라 소수의 홍위병들이 류샤오치의 관저에 침입했던 것.

<홍위병에 비투 당하는 류샤오치 1967년 7월 18일 중난하이에서/ 공공부문>

당시 베이징의 모든 상황은 거의 실시간으로 마오에 보고됐다. 마오는 이미 이목(耳目, 정보요원)을 이용한 정교한 통신 시스템을 잘 구축해 놓고 있었다. 당일 류샤오치 비투 소식을 전해들은 마오쩌둥은 “부재 중 비투가 좋지 않겠냐?” 말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권력자의 연막일 듯하다. 류샤오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 바로 마오였기 때문이다.

류샤오치와 왕광메이, 수난의 역정

마오가 최대의 정적 류샤오치를 제거하는 과정을 되짚어 보기 위해 1966년 가을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미 1966년 10월부터 중공중앙에서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자산계급 반동노선”의 대표라 비판당했다. 그해 12월 장칭은 공개적으로 류샤오치를 “당내의 흐루쇼프”라 비방했다. 12월 말, 베이징 전역에 “류샤오치 타도!” “덩샤오핑 타도!”의 구호가 난무했다. 1967년 초부터 류샤오치는 이미 정치권력을 모두 잃고 실질적으로 가택연금 상태에 놓이게 됐다.

중공중앙엔 특별수사대가 설치돼 류샤오치를 잡아넣기 위한 집중적인 표적수사를 개시했다. 40만 명을 동원한 대규모 조사로 류샤오치는 발가벗겨졌지만, 결정적 스모킹건은 나오지도 않았다. 류샤오치를 자산계급의 대표로, 왕광메이를 미(美)제국주의의 특수요원으로 몰고 가는 정치공작일 뿐이었다. 결론을 정해놓고 짜서 맞추는 정치쇼였다.

마오는 류샤오치를 국가주석의 자리에 그대로 남겨 둔 채로 성난 군중의 표적이 되게끔 했다. 이미 중공 기관지들과 관영방송은 류샤오치에 “당내의 흐루쇼프”, “사회주의 배신자”, “주자파,” “수정주의 당권파,” “반역자,” “반동분자” 등등 매도와 비방의 낙인을 찍은 후였다. 그 중 1967년 4월 1일 “인민일보”의 제 1면에 대서특필된 “홍기(紅旗)”지의 부편집장이자 중앙문혁소조 성원 치번위(戚本禹, 1931-2016)의 “애국주의냐, 매국주의냐?”가 결정판이었다.

<”반도, 내간(內奸, 내부 간첩), 공인의 적 류샤오치의 반혁명 수정주의 간부노선과 교육노선을 철저히 비판하라!” 1969년 추정 한 농촌의 풍경 / 공공부문

정적을 잡는 올가미 “애국주의냐, 매국주의냐?

치번위의 이 글은 표면상 1948년 영화 “청관비사(清宫秘史)”에 관한 비평문이었지만, 그 실내용은 류샤오치를 반혁명의 매국노로 낙인찍는 언어의 독화살이었다. 치번위는 류샤오치를 직접 거명하지도 않은 채로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당내(黨內) 한줌의 당권파(黨權派)”를 향한 거친 공격을 퍼부었다. 특히 글의 마지막에 열거된 8조항의 질문은 인격살해의 흉기였다.

1) 왜 항일전쟁 전야에 생명철학, 투항(投降)철학, 반도(叛徒)철학을 선양했나?

2) 왜 항일전쟁 승리 이후 평화민주신당계의 투항주의 노선을 제출했나?

3) 왜 해방 이후 사회주의 개조에 반대했나?

4) 왜 계급투쟁 식멸론(熄滅論)을 선양하고 계급합작을 주장했나?

5) 왜 “3년 고난의 시기” 수정주의 노선을 고취했나?

6) 왜 1962년 이래 부패한 자산계급 세계관과 반동적 유심주의 철학을 선양했나?

7) 왜 사회주의 교육운동 중 기회주의 노선을 추진했나?

8) 왜 문혁 과정에서 당내의 한줌 주자파 당권파와 결탁해 자산계급 반동노선을 취했나?

<1967년 4월 1일, “인민일보” 제 1면, 치번위의 “애국주의냐, 매국주의냐”/ 人民日報>

류샤오치의 모든 정치적 이력을 문제 삼는 8개항의 질문은 실질적으로 사형선고와 다를 바 없었다. 치번위는 8개항의 질문에 자답(自答)했다. “답은 오직 하나다! 당신은 근본적으로 베테랑 혁명가가 아니라 가짜 혁명가다! 반혁명분자다! 당신은 우리 주변에 잠자는 흐루쇼프다!” 류샤오치의 심장에 말뚝을 박고 기름을 부어 불태우는 무시무시한 언어였다.

1967년 4월 9일 홍위병들은 중난하이의 류샤오치 관저를 방문했다. 그들은 류샤오치에게 치번위가 제기한 8개항의 질문을 들이대면서 해명을 요구했다. 류샤오치가 치번위의 비판이 오류라 항변하자 한 명이 마오쩌둥 어록 소홍서(小紅書)를 들고 류샤오치의 뺨을 때리면서 소리쳤다. “독을 퍼뜨리지 말라!”

1967년 4월 10일, 새벽 6시 30분 경, 홍위병들은 왕광메이를 차에 태워 칭화대학교의 캠퍼스로 끌고 갔다. 왕광메이를 30만 군중 앞에 세우고 비투하기 위함이었다. 홍위병들은 왕광메이에게 1963년 그녀가 영부인 자격으로 인도네시아 방문시 수카르노에서 입었던 바로 그 화려한 의상을 입으라고 강요하는데······. <계속>

<1967년 4월 10일, 칭화대학 30만 군중대회에 불려나가 비투당하는 왕광메이의 모습.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방문 당시의 왕광메이의 복장에 진주목걸이 착용을 조롱하기 위해 홍위병들은 그녀의 목에 탁구공 목걸이를 만들어 걸었다./ 공공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