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장이 활기를 되찾으면서 2월 화랑미술제의 호황을 시작으로 다가오는 5월 아트부산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각 도시의 아트페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단연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한 ‘아트바젤’이다. 스위스의 소도시 바젤에서 출발한 아트페어가 예술의 심장부라 일컬어지는 파리나 뉴욕의 아트페어를 제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 시민들의 연대로 바젤 시립미술관 소장품으로 남게 된 피카소의 작품과[(우) 피카소, 앉아있는 광대, 1923, 캔버스에 유채, 130.5 x 97 cm (Pablo Picasso, Arlequin assis) 피카소가 기증한 같은 년도, 같은 주제의 다른 작품 (photo Jonas Hanggi) ©Succession Picasso, Kunstmuseum Basel
HxB: 130.2 x 97.1 cm; Öl auf Leinwand; Inv. G 1967.9

피카소를 지켜라

1967년 키프로스 섬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가 일어났다. 바젤에서 만든 항공사로, 최대주주도 사망한 대부분의 승객들도 바젤 시민이었다. 막대한 보상금을 급히 마련하기 위해 항공사 사장은 고흐 그림 한 점을 팔았지만 부족했다. 이에 바젤 시립미술관에 대여하여 전시 중이던 피카소의 작품 두 점을 마저 팔기로 했다. 그러나 미술관은 가치가 높은 작품이니 시의 예산으로 구매하여 미술관이 계속 소장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두 작품의 당시 가격은 840만 스위스프랑. 바젤시는 긴급 예산을 투입하여 약 600만 스위스프랑을 마련하고, 잔금은 후원자의 모금에 의존하기로 했다. 하지만 세금으로 미술품을 사는 것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바젤의 예술가들조차 스위스 현대 미술가의 작품이 아닌 피카소의 작품을 위해 후원자들이 나선다는 사실에 반대했다. 때마침 그해에는 시장 선거가 있었다. 민심은 피카소를 사는 것에 찬성이냐 반대냐로 나뉘었다. 젊은 세대는 작품을 구매할 것을 주장하며 피카소 작품 속 광대처럼 고깔모자를 쓰고 거리에 나가 후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기성 세대는 반대했다. 프랑스어권 지역 사람들은 긍정적이었지만, 독일어권 사람들은 부정적이었다. 피카소의 작품은 정치, 세대, 지역을 나누는 이슈가 되었다. 결국 피카소를 지지하는 시장 후보가 승리했고, 세금과 후원금으로 작품을 구매했다. 후원금은 필요한 금액 이상으로 걷혔다. 미술관에 남은 피카소의 작품과 비슷한 시기 작품이 약 1000억원 이상에 거래되고 있으니 단순히 경제적인 측면만 보아도 바젤 시민들의 세금과 후원금은 큰 투자 효과를 거둔 셈이다.

피카소가 바젤 시에 기증한 두 작품, <비너스와 에로스>(1967, 캔버스에 유채, 195 x 130 cm), <커플>(1967, 캔버스에 유채, 195 x 130 cm)과 피카소가 작업실에서 작품을 기증하는 장면을 찍은 Kurt Wyss의 사진 설치 (Photo Julian Salinas) ©Succession Picasso, Kunstmuseum Basel

기증과 미술관

피카소는 당시 86세로 남프랑스에 머물며 지난 10년간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바젤의 두 젊은 기자는 이 기쁜 소식을 피카소에게 알려야 한다며 여러 자료를 들고 약속도 없이 길을 떠났다. 피카소의 집을 찾으며 배회하던 이들이 차를 타고 가던 피카소의 부인 재클린을 우연히 만났고, 부인은 깜짝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며 두 기자를 초청한다. 다음 날 그들이 피카소의 집에서 발견한 선물은 바로 바젤의 신임 시장이었다. 피카소 부부가 그를 초대한 것이다. 선물은 하나 더 있었다. 자신의 작품을 지켜준 바젤 시민들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작품 한 점을 선물로 줄 테니 고르라는 것. 미술 전문가도 아닌 젊은 시장의 심장은 얼마나 두근거렸을까? 두 작품 앞에서 고민하는 시장에게 피카소 부부는 두 작품을 모두 주기로 한다. 게다가 바젤 시립미술관에 남기로 한 작품과 같은 시기에 그린 다른 작품과 뉴욕 현대미술관에 있는 걸작 ‘아비뇽의 처녀들’의 스케치도 내주었다.

피카소가 작품을 기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이번엔 바젤의 컬렉터들이 감동을 받아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아끼던 피카소 작품을 기증했고, 이렇게 해서 피카소와 아무 연고도 없던 바젤시립미술관은 피카소 전문 미술관 못지 않은 컬렉션을 갖추게 되었다. 세금으로 값비싼 미술 작품을 사서라도 시립미술관의 소장품으로 지켜야 한다는 시민들의 연대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바이엘러 파운데이션 재단 미술관, 건축 렌조 피아노 (photo Mark Niedermann) ©FondationBeyeler
바이엘러 파운데이션 재단 미술관, 건축 렌조 피아노 (photo Mark Niedermann) ©FondationBeyeler

예술 도시의 조건

이 소식은 전 세계의 언론으로 퍼져 나갔고, 1970년 시작된 ‘아트바젤’의 초석이 되었다. 아트바젤 창립위원이었던 갤러리스트 에른스트 바이엘러는 자신의 성공은 바젤이라는 도시 덕분이었다며 미술관을 지어 수많은 소장품을 기증하고 떠났다. 제약회사 로슈는 바젤 출신의 작가 장 팅겔리의 미술관을 설립하여 후원하고 있다. 모두 아트바젤을 방문하면 꼭 들러야 할 미술관이다.

아트바젤 마이애미’가 개최되는 마이애미 컨벤션 센터 ©Artbasel

2002년 아트바젤은 마이애미로 확장했다. 바젤의 성공을 눈여겨본 마이애미의 예술 애호가들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컨벤션 센터를 무상으로 임대해 줄 테니 대기자 명단에 있는 갤러리들이라도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첫해부터 성공이 이어지자 다음 해부터는 유수의 갤러리들이 마이애미 아트페어로 진출하면서 호황을 맞았다. 2005년부터는 자체적으로 ‘디자인 마이애미’를 출범시키고 바젤에 역수출하는 데도 성공했다. 디자인 디스트릭트와 후원자들이 지은 미술관이 자리를 잡은 덕분에 지난겨울에 아트페어는 코로나로 취소되었지만, 로컬 기관들이 연대하는 행사는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에른스트 바이엘러 아트바젤 창립위원. /바이엘러재단

2013년부터 홍콩으로도 진출하여 아시아 미술시장의 허브로 자리 매김했다. 아트바젤 홍콩은 다가오는 5월 각 갤러리들이 작품만 보내면 주최 측이 전시를 대신해주고, 온라인 라이브를 통해 전 세계에 중계하는 새로운 실험에 나설 예정이다. 홍콩은 타이쿤 복합문화센터와 엠플러스 미술관 등 새로운 문화기관을 설립하며 아트페어의 특수를 이을 뿐 아니라 아시아의 문화 중심도시가 되겠다는 야심을 하나씩 실현해나가고 있다.

이제는 세계의 사람들이 바젤 대신에 가까운 마이애미와 홍콩을 찾는다. 마이애미와 홍콩이 아트바젤을 통해 이룬 궁극적인 성과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예술 작품의 가치를 이해하고 공유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연대는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왔음을 목도하는 시대다. 우리도 최근 시장 선거가 있었고,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예술품 컬렉션의 향방에도 관심이 높다. 아트바젤의 스토리는 흥미로운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K아트를 준비하는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할 예술 도시 성립의 조건과 모델을 시사해주는 현재의 이야기다.

/김영애 이안아트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