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왕국’은 어린 시절부터 내 ‘최애’(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다. 지난 설 연휴에도 ‘동물의 왕국’ 시청은 어김없이 계속됐다. “‘아프리카의 여가장들’ 편을 다시 보는 거 어때?” 아버지 제안에 우리 부녀는 설날에 사자·코끼리·개코원숭이들과 마주했다. 자매들이 똘똘 뭉쳐 새끼도 돌보고 사냥도 하는 암사자들, 엄격한 계급사회를 이루며 생식 능력 기준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개코원숭이들(그래서 막내딸이 왕위에 오른다) 모두 흥미로웠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코끼리 무리였다.

코끼리는 대대로 딸에게 지식을 전수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전해 내려오는 지혜는 가족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며 안전한 길로 인도하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코끼리 가족 중 가장 존경받는 건 ‘할머니’다. 어린 코끼리는 할머니를 공경하며 할머니는 사냥꾼으로부터 아기 코끼리들을 지키기 위해 최전선에 나서 총알받이가 된다. 그리고 사냥꾼의 손에 가족을 잃거나 다친 코끼리들, 죽은 친구의 자식 코끼리까지, 고아가 되거나 홀로 남겨진 다른 코끼리들을 모두 품고 그야말로 한 ‘가족’이 된다.

핏줄이 아니어도 우리는 가족 /일러스트=김하경

코끼리 가족을 보고 느낀 감동 때문이었을까. 이튿날 조카와 놀아주다 문득 어린이 문학 ‘긴긴밤’을 함께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노든’은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랐다. 동물의 왕국 ‘아프리카의 여가장들’ 편에 나오는 코끼리들처럼 코끼리 고아원의 코끼리들은 가족을 잃은 어린 코끼리들을 입양해 보호해주고 있었다. 코끼리 고아원에는 눈이 멀거나 절뚝거리거나 귀 한쪽이 잘린 코끼리들이 있었다. 그런 코끼리들은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걷고, 다리가 튼튼한 다른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노든은? 그에게는 코끼리처럼 긴 코가 없었다. 왜냐고? 노든은 코끼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혀 문제는 없었다. 할머니 코끼리는 노든에게 코가 긴 코끼리들은 많으니까 너는 그저 우리 옆에 있으면 된다고, 코가 자라지 않는 건 별문제가 안 된다고 말해 주었다. 노든은 할머니 코끼리에게서 지혜와 현명을 배우고 더 멀리 보고 더 많은 것을 고려하는 법을 배웠으며 종국에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끝내 코뿔소인 자기 자신으로 사는 법을 배운다.

‘긴긴밤’은 글밥이 상당히 많아 사실 인생 10개월 차인 조카가 보기엔 어려워도 한참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책 속 그림들을 보여주며 한 글자 한 글자 찬찬히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어린 조카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조심스레 책장도 넘겨보고, 내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 노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펭귄 치쿠를 만나 목소리만으로 배가 고픈지 아닌지를 알게 되고, 발소리만으로 더 빨리 걷고 싶어 하는지 쉬고 싶어 하는지를 알게 되는 여정을 함께했다.

긴긴밤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가족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떠올렸다. 최근 몇 년간 새로운 형태의 가족과 공동체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다수 출간되기도 했다. ‘긴긴밤’을 포함한 이 책들이 전하는 건 다양성과 연대의 가치 아닐까. 최근 여가부가 법률·복지제도의 가족 개념을 손보기로 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명절은 지나갔지만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은 언제고 해도 좋다. 훌륭한 코끼리인 코뿔소 ‘노든’과 훌륭한 코뿔소인 펭귄 ‘나’의 이야기는 수많은 긴긴밤 내내 계속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