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A씨는 생후 5개월 무렵부터 저시력증 진단을 받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시력 저하로 나중에 안경을 써도 시력이 좋아지지 않았다. 시야까지 점점 좁아져 눈앞의 사물을 간신히 구별하는 정도가 됐다. 극심한 야맹증까지 오면서 저녁 이후에는 외출이 불가능했다. A씨는 최근 유전자 검사 덕에 대학 병원 안과에서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한 ‘유전성 망막 질환’인 ‘레베르 선천성 흑암시’로 판정받았다. 이 진단으로 A씨는 실명 단계에서 희망의 빛을 보게 됐다. 주사 한 번으로 돌연변이를 바로잡는 유전자 치료제 신약 ‘럭스터나’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억원이 드는 약값 때문에 치료에 엄두를 못 내고 있다.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되어 약값을 환자가 전액 지불해야 한다.

혁신 신약은 그림의 떡

요즘 유전자 조작 기술과 면역 세포 활용 기술 발달로 희소 난치성 질환을 고치거나 치료제가 없던 암을 완치하는 혁신 신약들이 대거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신약들은 수억 원대의 고가(高價)이고 건강보험 적용도 제한적이어서 대다수 환자에게 ‘그림의 떡’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나을 수 있게 하는 약을 눈앞에 두고도, 써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픽=송윤혜

척수성 근위축증 치료제 졸겐스마의 경우, 유전자 치료 주사 1회로 걷지 못하던 아이가 걷게 되는 ‘작은 기적’을 연출하지만, 약값은 25억원에 이른다. 특수 유형 백혈병 치료제 킴리아도 주사 한 번으로 백혈병이 완치되는 효과를 내지만, 약값은 5억원이다. 신약을 개발한 글로벌 제약 회사들은 치료 대상이 워낙 소수이고 연구·개발비로 수천억 원이 들어간 상황이라 약값이 수억 원대라고 말한다. .

초등학교 1학년 B군은 매일 10시간에 걸쳐 고농도 영양 수액 주사를 맞고 있다. 아이는 미숙아로 태어나 장이 썩는 괴사성 장염을 앓았다. 그로 인해 ‘단장(斷腸) 증후군’ 환자가 됐다. 소장 길이는 평균 6m 정도지만, 이 경우 2m 이하다. 소장 길이가 짧아 음식을 먹어도 영양소 흡수가 이뤄지지 못해 고농도 영양 수액을 맞아야 한다.

외국에서는 소장의 흡수 기능을 획기적으로 늘려줘 궁극적으로 영양 수액을 끊게 해주는 치료제 가텍스 주사제를 쓰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건강보험 적용이 사실상 어려워지면서 아예 국내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다. 약값은 한 해 최대 3억원에 이른다.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문진수 교수는 “효과적인 치료를 받지 못한 단장 증후군 환자의 사망률은 30%에 이른다”며 “환자가 겪는 고통, 삶의 질 등을 고려하여 희소 질환 치료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희소 질환 치료 지원 확대

최근 10년간 희소 질환을 치료하는 신약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국내 사용을 허가받은 의약품은 102개다. 이 중 건강보험 적용 대상으로 등재된 의약품은 57개로, 등재율은 56%다. 나머지는 치료제가 있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쓰기 어려운 상황이다. 재발성 백혈병 치료제 킴리아는 최근 건강보험 적용이 되면서, 보험 한 달 만에 약 10명의 환자들이 100여만원만 부담하고 치료를 받았다.

현재 건강보험에서 지급되는 약제비 중 희소 의약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1.44%다. 주요 선진국은 그 비율이 2.5~8.9%에 이른다. 즉 우리나라는 환자 수가 적은 곳에 상대적으로 지원이 적다는 얘기다. 건강보험으로 MRI를 찍는 대상을 늘리는 인기 영합적 정책은 이어지지만, 정작 죽고 사는 문제가 달린 희소 난치성 질환 지원에는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이에 경증 질환 지원을 줄이고, 중증 위주 건강보험 재정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8월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가 성인 1018명을 대상으로 한 혁신 신약 인식 조사에 따르면, 신약 건강보험 적용으로 건강보험료가 소폭 상승해도 괜찮냐는 질문에 56%가 찬성 의사를 표했다. 경증 질환 보장을 일부 축소하고 혁신 신약 건강보험 적용을 늘리는 것에 공감하느냐는 질문에도 동의(42%)가 반대(32%)보다 많았다.

환자 단체와 의약학계에서는 국내 도입에서 건강보험 등재까지의 기간을 줄여서 약이 있어도 쓰지 못해 세상을 뜨는 일을 막고, 대체 치료제가 없는 희소 난치성 신약은 경제성, 유효성 등 건강보험 평가 절차를 과감히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일단 환자들이 약을 써보고 그 결과에 따라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정책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우선은 ‘치매 예방약’ 등 효능이 입증되지 않은 여러 약을 재평가해 건강보험에서 탈락시키고, 거기서 남는 재정으로 약효가 확실히 입증된 중증·희귀 질환 치료에 건강보험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은 별도 기금 마련해 난치병 환자에게 신약 지원]

최근 희소 난치성 질환 유전자 치료제와 완치 효과를 노리는 면역 세포 치료 항암제 등이 고가의 혁신 신약 형태로 대거 개발되어 나오면서, 선진국들도 이를 어디까지 건강보험으로 적용해서 써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모두 건강보험으로 해주자니 엄청난 재정이 들어가고, 안 해주자니 눈앞에 치료제를 놓고도 환자들이 세상을 뜨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의약계에서는 이를 항암제 사용에 따른 부작용에 빗대어 ‘약값 독성(financial toxicity)’이라고 부른다.

국민건강보험을 국가가 세금 형태로 거둬 운영하는 영국은 소수를 위한 혁신 신약을 다수가 이용하는 건강보험 재정으로 모두 지원할 수 없게 되자, ‘신(新)의료 기금’을 만들어 건강보험에 등재되기 어려운 신약을 희소 질환자들이 쓸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호주도 이른바 ‘생명 구하는 의약품 프로그램’을 통해 고가의 희소 질환 치료제에 대한 접근성을 개선하고 있다.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 유럽연합 국가들은 혁신 신약 건강보험 제도를 통해 일단 사용이 허가된 약품에 대해 보험으로 모두 건강보험 등재를 하여 희소 질환자를 돕고 있다. 미국과 일본은 대체 치료제가 없는 희소 질환 신약에 대해서는 우선 심사 제도를 통해 신속하게 사용 승인을 내주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