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현악 사중주단 ‘아레테 콰르텟’의 지난 4월 예술의 전당 무대는 활기찬 에너지로 가득했다. 평균 연령 25세의 이들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알반 베르크의 ‘서정모음곡’을 비롯해 슈베르트와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곡들을 놀랄 만큼 훌륭하게 연주해내며 감탄을 자아냈다. 더 놀라운 것은 지난 2019년에 창단된 후 급격히 성장해 2021년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콩쿠르의 현악 사중주 부문 한국인 최초 1위 및 5개의 특별상을 모두 석권했다는 점이다.

독주자나 성악가에 비해 현악 사중주단의 국제 콩쿠르 우승 소식은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것 같다. 일찍이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현악 사중주를 “네 명의 지성인들이 나누는 대화”에 비유했던 만큼 현악 사중주의 순수하고 지적인 면이 일반 음악 애호가들에겐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모차르트와 베토벤 등 위대한 작곡가들은 현악 사중주를 통해 작곡가로서 능력을 발휘하고자 했다. 작곡을 빠르고 쉽게 했던 모차르트도 하이든에게 헌정할 현악 사중주곡들을 쓸 때만큼은 오랜 시간 공을 들이며 심혈을 기울였다. 베토벤은 현악 사중주야말로 자신의 심오한 사상을 펼칠 수 있는 진지한 음악이라고 생각해 생애 전반에 걸쳐 꾸준히 현악 사중주곡을 작곡했다. 말년의 베토벤이 교향곡 분야에선 오로지 ‘합창 교향곡’만 완성한 데 비해 생애 마지막까지 현악 사중주 작곡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러나 만일 베토벤 곁에 그의 심오한 예술성을 이해했던 슈판치히 사중주단이 없었다면, 베토벤이 수준 높은 현악 사중주곡들을 작곡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현악 사중주는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가벼운 음악이었다. 하지만 1808년에 이그나츠 슈판치히를 비롯한 뛰어난 연주자들로 구성된 슈판치히 사중주단이 탄생하면서 전문 현악 사중주단의 시대가 열렸다. 슈판치히는 이미 청년 시절부터 베토벤과 잘 알고 지내며 바이올린 레슨을 해주기도 했고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곡의 초연을 주도했다. 베토벤이 라주모프스키 백작에게 헌정한 세 곡의 라주모프스키 사중주곡도 슈판치히 사중주단이 초연했다. 당시 슈판치히가 이 곡이 너무 어렵다고 불평하자 베토벤이 “내가 작곡을 할 때 그 삑삑거리는 작은 깡깡이 따위를 신경이나 쓰는 줄 아는가?”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비록 베토벤이 슈판치히의 불평을 묵살해버리긴 했지만 슈판치히가 빈을 떠나게 되었을 때는 몹시 섭섭했을 것이다. 1815년에 슈판치히는 빈을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그리고 베토벤은 슈판치히의 부재 기간 중 단 한 곡의 현악 사중주곡도 쓰지 못했다.

1823년에 슈판치히가 다시 빈으로 되돌아오자 베토벤은 매우 반가워하며 환영 노래를 작곡했다. 비만한 체형의 슈판치히는 실내악 연습을 위해 베토벤의 집 계단을 4층이나 오를 때마다 불평을 늘어놓곤 했는데, 베토벤은 이런 슈판치히의 모습이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빈으로 되돌아온 슈판치히는 다시 베토벤의 후기 현악 사중주곡들을 연습한 후 대중을 위한 실내악 공연에서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곡들을 선보였다.

당시 현악 사중주곡을 공공음악회에서 연주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슈판치히 사중주단의 실내악 공연은 꽤 인기가 있었다. 슈판치히 사중주단은 1823년 6월 12일에 첫 실내악 콘서트 시리즈를 시작해 7월 17일까지 6회의 연주회를 열었다. 그들의 연주에 강한 영감을 받은 슈베르트는 현악 사중주 ‘로자문데’를 작곡해 슈판치히 사중주단에게 헌정했고 이후에도 ‘죽음과 소녀’를 비롯한 현악 사중주의 명곡들을 작곡했다.

19세기 초반, 하나의 뛰어난 현악 사중주단이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영감을 자극해 현악 사중주의 명곡을 탄생시켰고 그 명곡들은 이 시대의 현악 사중주단에 의해 새롭게 연주되며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2018년 위그모어홀 국제 현악사중주 콩쿠르에서 우승한 에스메 콰르텟이 얼마 전 리사이틀 무대에서 현악사중주의 명곡들을 탁월하게 연주해낸 데 이어 노부스 콰르텟이 올해 베토벤 현악사중주 전곡 시리즈를 진행할 예정이다. 실력파 현악 사중주단의 공연이 많은 요즘 현악 사중주에 귀 기울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