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을 관람했다. 배경도 내용도 음악도 안개였다. 영화 처음부터 정훈희의 ‘안개’가 깔리다 영화 마지막에는 정훈희가 남자 가수와 새로 녹음한 ‘안개’가 흘러나왔다. 그 남자 가수가 누구인지 알 듯 말 듯했다. 남자 가수의 정체를 확인하느라 영화 크레디트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송창식이었다. 1967년, 정훈희 나이 16세에 발표한 노래를 55년이 지난 2022년에 정훈희와 송창식 목소리로 듣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 흘러온 세월만큼 노래에서 연륜과 깊이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는 유독 안개를 소재로 한 노래가 눈길을 끌었다. 이봉조의 편곡으로 1962년에 발표한 현미의 ‘밤안개’는 ‘It’s a lonesome old town’의 번안곡이다. 이 노래가 1960년대 안개를 제목으로 한 노래의 서막을 열었다. 1964년에 ‘밤안개’라는 제목의 영화도 나왔는데, 그때는 노래 제목을 ‘밤안개 블루스’라 하고 가사도 조금 바꿔서 현미 대신 한명숙이 불렀다.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1967년)과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1968년)도 유명하다. 배호의 대표곡 ‘안개 낀 장충단 공원’에서 안개는 외로움과 슬픔을 강화하는 요소로 쓰였다.

정훈희가 ‘안개’를 부르게 된 사정도 영화 같다. 어느 날, 정훈희의 작은아버지 정근도가 악단장으로 있던 클럽에서 정근도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정훈희가 노래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찾아온 이봉조가 그의 노래를 들었고, 몇 곡을 더 시키더니 박자를 가지고 놀며 노래하는 정훈희에게 “건방지게 노래 잘하네”라고 했다 한다. 덕분에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영화로 만든 ‘안개’(김수용 감독)의 주제가를 정훈희가 부를 수 있었다. 영화 ‘안개’는 개봉 당시 극장의 관객 집계만 1만3600명을 기록하여 소설, 영화, 노래가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이후 1970년 제1회 도쿄국제가요제에서 정훈희가 ‘안개’로 입상해 ‘안개’의 성공을 이어갔다. 윤형주와 송창식으로 구성된 ‘트윈폴리오’를 위시한 국내 가수들, 프랑스의 샹송 가수 ‘이베트 지로’, 일본 혼성 트리오 ‘하파니스’ 등도 ‘안개’를 노래했다. 2007년에는 영화 ‘M’(2007년)에도 사용되었다.

다시 영화 ‘헤어질 결심’이다. 최근에 이 영화를 N차 관람하는 관객이 늘고 있다 한다. ‘안개’ 속에서 선명한 무언가를 잡고 싶어서 그럴 것이다. 둘러보니, 노래와 영화처럼 세상도 안갯속이다. 언젠가 안개 걷히면 모든 것이 선명해질까? 그 세상에서 우린 행복할까? 안개 걷힌 세상에서 ‘붕괴’하지 않기를. ‘마침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