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이 청력을 잃어 불우했다고 하지만, 사실 인복은 많았다. 그는 커피를 끓이기 전에 매번 커피 알 60개를 셀 정도로 편집증이 심하고 알코올중독기까지 있었다. 굶어 죽기 십상이었던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괴팍한 성격을 잘 참아준 후원가들 덕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수원은 인복이 없었지만, 청력을 잃고 주변의 도움을 받은 것까지는 베토벤과 비슷했다. 24세에 과거시험에 급제할 만큼 명석했으나 역적 집안 출신인 데다가 소론(少論)에 속해서 지방을 떠돌았다. 풍토병에 걸려 청력까지 잃었다. 스스로 농객(聾客) 즉, 귀머거리라 부르며 좌절했다.

유수원이 처량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쓴 우서(迂書)는 “세상 물정에 어두워 실용적이지 못한 글”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에 감탄한 독자들이 “그가 헛되이 나이를 먹는 것이 아깝다”며 왕에게 그를 천거했다. 탕평책을 추구하던 영조는 유수원을 불러 필담을 나누면서 그 총명함을 확인했다.

유수원은 시대를 앞섰다. 화폐 공급과 물가는 비례한다면서 재정 고갈을 이유로 돈을 더 찍는 것을 만류했다. 공공재인 화폐는 잘 순환하는 것이 생명인데, 그것의 부족을 느끼는 근본 원인은 부의 편중에 있다고 진단했다. 후대의 정약용보다 생각하는 수준이 훨씬 높았을 뿐만 아니라 20세기 경제학자 케인스의 ‘화폐개혁론’과도 일맥상통했다. 그러나 모함 앞에 무너졌다. 역모죄 누명을 쓰고 고문받은 뒤 능지처참당하고, 자식들은 교수형 당했다. 유능한 사람이 그 유능함을 두려워하고 시기하는 다수의 횡포에 희생된 것이다. 그가 만일 다수파 노론(老論)한테 음해받지 않았다면, 세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1737년 이 무렵 영조가 우서를 읽고 단양군수 유수원을 면접했다. 그러고 사헌부로 불렀다. 오늘날에도 대통령이나 기관장들이 글을 통해 인재를 발탁한다. 측근의 근거 없는 모함을 잘 걸러내야 그 탕평책이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