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때 대대적인 사면을 행할 때 예외조항이 모반대역, 부모 살해, 처첩이 남편을 죽인 것, 노비가 주인을 죽인 것 외에 염매(魘魅)한 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염매의 염(魘)이란 원래 ‘가위눌리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사람 형상을 만들어놓고 쇠꼬챙이로 심장을 찌르고 눈을 후벼 파고 손발을 묶는 것을 말하고 매(魅)란 나무나 돌로 귀신을 만들어놓고 저주를 비는 것을 말한다. 이런 따위 행위를 염승술(厭勝術)이라고도 하고 압승술(壓勝術)이라고도 했는데 주술을 쓰거나 주문을 외어 화복(禍福)을 눌러 없애는 것을 뜻한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압승술 사례는 문종이 세자로 있을 때 처음 빈(嬪)으로 맞아들인 휘빈 김씨의 일이다. 세종 9년(1427년) 세자빈이 되었으나 병약했던 세자는 그를 찾지 않았다. 이에 휘빈 김씨는 시녀 호초의 말을 듣고서 압승술을 행했다. ‘남자가 좋아하는 부인의 신발을 베어다가 불에 태워서 가루를 만들어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내가 사랑받게 되고 저쪽 여자는 배척을 당하게 된다.’ 결국 이 일로 2년 후인 세종 11년 7월 20일 김씨는 폐빈(廢嬪)당해 대궐에서 쫓겨났다.

얼마 전 거대 야당 대표가 자기 부모 묘소가 훼손을 당했다며 “일종의 흑주술로 무덤의 혈을 막고 후손의 절멸과 패가망신을 기원하는 흉매라고 한다”라고 그 사실을 밝혔다. 또 흉매를 ‘양밥’이라고 표현했는데 양밥은 원래 액막이 혹은 액땜을 뜻하니 정확한 용어 사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설사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후손으로서는 남이 알까 무서워 조용히 처리할 일이다. 길사(吉事)는 아니기 때문이다. 본인 말대로 “흉매이지만 함부로 치워서도 안 된다는 어르신들 말씀에 따라 간단한 의식을 치르고 수일 내 제거하기로 했습니다”라고 했으면 그걸로 끝이다. 그런데 확인도 안 된 미신을 ‘이 와중에’ 온천하에 공개한 심리 혹은 의도는 뭘까? 그것이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