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는 종교가 아닌 것 같아도 종교였다. 사회규범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강오륜(三綱五倫), 효제충신(孝悌忠信)과 같은 규범은 조선 사회를 지배하는 절대적 가치였기 때문이다. 이걸 어기면 박살났다. 종교로서의 유교가 지닌 약점이랄까 독특한 특징은 사후 세계에 대해서 입을 다물었다는 점이다. 공자가 말한 ‘미지생(未知生)인데 언지사(焉知死)!’ 내가 아직 생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겠는가! 합리주의자에게는 공자의 이 같은 점이 참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와 허무감을 달래주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조선 시대 유교가 커버하지 못하는 사후 세계 분야를 ‘땜빵’했던 것이 풍수였다. 명당에다가 묘를 쓰면 본인도 명당에 묻히니까 안심이 되고 자식들에게도 발복이 되니까 꿩 먹고 알 먹고이다. 풍수는 죽음이 풍기는 ‘절대무(絶對無)’의 공포를 달래줄 수 있는 비공식의 종교였다. 내가 30대 중반에 만났던 충북 괴산의 80대 어느 풍수 마니아. 10대 후반부터 풍수를 공부해 왔던 이 양반이 새파란 젊은이였던 필자를 앞에 놓고 담담하게 들려주었던 신앙고백이 지금도 참 인상적으로 기억된다.

“내가 들어갈 신후지지(身後之地·묫자리)가 복호혈(伏虎穴)이네. 이걸 잡아 놓고 나니까 참 기분이 좋아. 나 요즘 아파도 약도 안 먹네. 빨리 죽어서 명당에 들어가면 나도 좋고 자식들도 잘될 생각을 하니 죽음이 기다려져!” 종교 신앙이 현실주의자를 위한 현세적 기복의 차원으로 축소되면 묫자리 파괴 내지는 쟁탈전이라는 전투가 벌어진다. 중국 공산당의 린뱌오(林彪)가 마오쩌둥에게 도전하는 기미를 보이자 마오쩌둥은 사전 정지 작업을 하였다.

우선 린뱌오의 고향 선산에 있었던 린뱌오 조상 묘의 입수맥(入首脈·기가 들어오는 맥)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뜸을 뜨듯이 묘 곳곳에 철근을 박아 넣었다. 유물론을 신봉하는 공산주의자들이었지만 묫자리의 발복은 경쟁자의 정치 생명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린뱌오는 비행기를 타고 몽골 국경을 넘어 도망가던 중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했다.

부관참시(剖棺斬屍)도 같은 맥락이다. 땅속에 묻혀 있는 죄인의 유골을 파괴함으로써 당사자 집안을 멸문시킨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같은 유교 문화권이지만 이상하게도 일본은 이런 기복적 풍수신앙이 없다. 한국, 중국은 아직까지 밑바닥 저층에 이 신앙이 멸종되지 않고 남아서 꿈틀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