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더 글로리’와 ‘모범택시’를 본 후, 학교폭력으로 자살을 결심한 ‘더 글로리’의 문동은이 한강변에서 ‘죽지 말고 복수하세요’라는 ‘모범택시’ 속 복수 대행 회사의 광고 문구를 봤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했다. 살인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만든 무지개 택시 회사의 복수로 그녀는 구원받을 수 있었을까.

우리가 복수 이야기에 열광하는 건 나쁜 사람을 단죄하고 싶은 우리의 욕망이 얼마나 원초적인지 보여준다. ‘이야기의 탄생’에서 윌 스토는 부족에게 전해지는 이야기의 80퍼센트가 ‘처신’에 관한 내용이고, 성경과 코란은 일종의 통제이론으로 우리가 사회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고 말한다. 이때 복수는 잘못된 ‘처신’이 만든 사회적 ‘처단’이다.

문제는 복수의 특성이다. 복수란 칼집 없는 칼과 같아서 내 몸에 상처를 내지 않는 복수는 없다. 누군가를 증오할 때 평범한 일상은 사라진다. 하지만 용서가 우리를 고통에서 해방시키는가의 문제는 삶이 망가진 사람들에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내 아이를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기 위해 찾아간 감옥에서 자신은 ‘주님’께 이미 용서받았다고 고백하는 살인자를 마주한 후, 다시 지옥에 빠진 영화 ‘밀양’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용서란 이토록 어려워서 섣불리 강요하거나 시도해선 안 된다.

언젠가 유족의 복수에 대한 질문에 프로파일러 표창원은 “그런 일은 영화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가장이 죽으면 가족은 경제적으로 무너진다. 먹고사는 일이 바쁘기 때문에 복수는 사치”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나는 ‘죽지 말고 복수하세요’라는 말을, 자살을 시도했던 ‘동은’ 곁에서 “물이 차니 지금 말고, 우리 봄에 죽자”라고 말한 할머니의 말로 대신하고 싶다. 봄에 죽으라는 말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지옥 같은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과거는 변하지 않지만 과거에 대한 해석은 변할 수 있다. 이때의 복수는 내가 쥔 칼에 ‘칼집’을 만들어 나를 지키는 것이다. 시간은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