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한민국 국민임이 자랑스럽다”는 사람이 참 많다. 분단, 전쟁, 가난, 독재 등 각종 비참함을 돌아 가며 상징하던 이 나라가 불과 수십 년 만에 세계를 호령하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으니 자랑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화려한 그 모습의 이면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한 가지 긴 ‘어두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전통’ 문화에 대한 우리 국민의 거대한 외면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가장 큰 특징은 선진국치고 우리만큼 문화적으로 소위 ‘외국 것’들에 잠식당하고 있는 나라가 없다는 슬픈 현실이다. 통계가 말해 준다. 예를 들어, 음악 분야를 살펴보면 국악이 우리 전체 공연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티켓 판매액 기준으로 전체의 1% 정도이다. 나머지는 다 ‘서양의 것’이다. 공연 예술만 그런 것이 아니다. 미술, 조각, 춤, 서예 등 이 나라 문화가 명함을 내걸고 있는 거의 모든 장르에서 ‘서양의 것’들이 온전히 판을 치고 있다. 그러니 “나라가 문화적으로는 아직 식민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표현이 그리 과장이 아닌 것이다. 한 나라에서 전통 문화가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외면당하는 이 현상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일러스트=박상훈

역사적으로 위대하게 세계를 호령한 적이 있는 나라들은 한 나라도 그러지 않았다. 그들에는 무력·경제력과 함께 큰 ‘문화의 힘’이 있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이 보여 준 민족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헌신들이 그 나라 각각의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역사가 짧아 아예 전통 문화라는 것이 없는 미국 같은 나라도 재즈, 컨트리 뮤직, 팝송 같은 ‘미국형’ 전통 음악에 대한 애정과 헌신은 대단하다.

도대체 우리 대한민국은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나는 그것이 일제 식민 시대가 배태시킨 ‘민족적 열등감’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식민 국가 시민’이라는 부끄러운 딱지가 준 상처가 궁극적으로 민족 문화에 대한 외면, 박대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 문화는 본질적으로 자랑할 만한 무엇이 정말 있는 것인가? 나는 체험을 통해 ‘그렇다’고 확신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나는 한때 IGM이란 CEO 교육 기관을 운영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수학여행을 골프장이 아니라 민족 문화를 맛볼 수 있는 곳으로 갔다. 예를 들면, 안동의 병산서원 같은 곳이다. 조선 시대 서원이란 한마디로 양반들을 위한 사설 교육 기관이었다. 그곳에서 1박 2일 동안 소위 조선의 사상, 문화, 관습들을 배웠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한 CEO가 “나의 민족성을 이렇게 깊이 깨달은 적이 없다”고 소감을 말하면서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우리 모두가 그 눈물에 공감했다. 그만큼 한국의 전통 사상은 강력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문화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안동에서의 경험은 새로운 실험으로 연결되었다. 이번에는 ‘한국 가곡’이 그 대상이었다. IGM의 지하 구내식당에서 저명한 CEO 20여 명을 모신 가운데 ‘우리 가곡 음악회’를 한번 열어 보았다. 한국 가곡이란 ‘한국의 시와 한국의 선율들을 합쳐 만든’ 문자 그대로 ‘김치 냄새’가 온통 나는 전통 장르이다. 그 공연에 대해 CEO 관객들이 보여준 압도적인 반응을 몇 번 목격하면서 우리 문화의 잠재력에 대한 진정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나는 몇몇 뜻 있는 분과 의기투합해서 ‘한가사모(한국 가곡을 사랑하는 모임)’라는 것을 만들게 되었다. 약 20명의 한가사모 회원은 1년에 3~4회씩 정기적으로 모여 ‘가곡 잔치’라는 것을 열고 있다. 모두 행복해하며 즐거워한다.

한가사모는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가사모 주최 송년 음악회’까지 열게 되었다.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기 몇 달 전이었다. 우리는 세종문화회관을 빌려 회원들이 각각 초대한 관객 1000여 명을 상대로 ‘한국 가곡’을 공연했다. 관객들이 보였던 그 격렬할 정도의 반응은 우리 모두에게 ‘민족 혼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를 실감케 했다. 불행히도 코로나로 중단되어 버렸던 그 송년 음악회가 올해 말에 다시 열린다. 참 많은 사람이 지금 그것을 고대하고 있다.

이것이 모두 무엇을 입증하는가? 딱 한 가지이다. 잘만 접근하면, ‘김치 냄새’가 ‘버터 냄새’를 얼마든지 압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5000년에 걸친 긴 역사를 가진 대단한 문화 민족이다. 불행히도 식민 시대가 이 민족의 자부심을 까 부셔버리면서 문화에 대한 자부심까지도 짓밟아 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마디로 우리 국민은 다른 선진국들의 그것에 비해 너무나 많은 것을 상실한 채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고유 문화는 탁월한 잠재력을 가진 거대한 민족적 자산이라고 확신하게 된 사람이다. 음악만이 아니다. 시조, 탈춤, 판소리, 서예, 도자기, 공예 등 이런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영혼’을 거대하게 자극하고 고양시켜 줄 보고들임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 이 나라에 다시 민족의 문화적 영혼을 찾는 물결이 일어나야 한다. ‘한판사모(한국 판소리를 사랑하는 모임)’ ‘한탈사모(한국 탈춤을 사랑하는 모임)’ 같은 것이 계속 나와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물론 정부가 힘을 써야 한다. 그러나 나는 정부보다 기업이 앞장서고 정부가 뒤를 미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라 생각하는 편이다. 경제를 일으키는 데는 관료 시스템이 효율적일 수 있지만, 문화는 좀 다르다. 나는 이 나라 CEO들에게 부탁드리고 싶다. 간단하게 한번 시작해 보시라. 회사의 행사에 우리의 가곡, 판소리, 탈춤 등을 한 가락씩 넣어드려 보시라. 그것을 공연한 예술인들을 후하게 대접해 드리시라. 직원들이 만든 전통 문화 동호회에 회사가 작은 지원금으로라도 격려해 드려라. 이 작은 풀뿌리들이 반드시 거대한 풀뿌리로 자랄 것임을 나는 약속할 수 있다. 직원들의 민족적 자부심은 물론, 그들의 창조적 역량도 많이 고무시킬 것이다.

한 민족의 경제적 풍요와 문화적 정체성은 궁극적으로 민족의 역사라는 수레의 두 바퀴이다. 역사의 수레가 앞으로 전진하려면 이 두 바퀴가 반드시 함께 굴러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