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윤석열 대통령을 찍은 국민은 ①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바로잡고 ②개혁으로 대한민국을 바꾸고 ③분열된 나라를 통합해 주길 기대했다. ①은 적어도 윤 대통령을 찍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방향으로 확실히 가고 있다. 최근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다큐멘터리에서 “5년간의 성취가 순식간에 무너져 허망하다”고 한탄하자 윤석열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확신한다”고 반박했다.

②와 관련해서 윤 대통령은 “거야(巨野)에 가로막혀 필요한 제도를 정비하기 어려웠다”고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지난 1년간 국민께서 변화와 개혁을 체감하기에는 시간이 좀 모자랐다”며 솔직하게 성과 부족을 인정했다. ③은 문재인 정부 때보다 나빠졌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성취’가 순식간에 무너진 것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엇비슷한 위상인 김영삼·김대중의 퇴임 후 평가가 갈린 결정적 이유도 그것이다. 만약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①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30%가 넘는다는 데 경악하는 사람 ②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사람이 30%가 넘는 사실에 분노하는 사람 ③양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여전히 저토록 많은 현실에 절망하는 사람이다. 언뜻 천하삼분 형세라 모두 기회가 있는 듯 보인다.

민주당은 정체성, 리더십, 지지 기반의 삼중 위기를 동시에 겪고 있다. 김대중·노무현이 이끌던 민주당은 민주주의, 한반도 평화, 서민 경제라는 분명한 가치와 비전이 있었다. 지지자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당시 민주당 지도자는 지지자에게 욕먹을 용기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지도자가 없다. 이제 민주당은 ‘찍고 싶은’ 정당이 아니라 마지못해 ‘찍어주는’ 정당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탈냉전과 함께 찾아 온 세계화 시대에는 민주당 노선이 국민적 동의를 받으면서 한국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한국 정치의 기본 지형은 ‘민자당 대 반민자당’ ‘한나라당 대 반한나라당’ ‘새누리당 대 반새누리당’으로 보수가 주류였고 상수였다. 민주당은 ‘DJP 연합’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정의당과 후보 연대’를 해야 겨우 맞설 수 있었다.

2017년 탄핵 이후 이 지형은 극적으로 변했다. 지금은 ‘민주당 대 반민주당’ 시대다. 민주당이 주류고 상수다. 2020년 총선에서 미래통합당과 국민의당 연대, 2021년 4·7 서울시장 재보선 오세훈·안철수 단일화, 2022년 대선 윤석열·안철수 단일화에서 보듯 과거 민주당의 전매특허였던 단일화, 후보 연대가 이젠 보수의 몫이 되었다.

지난 30년간 보수와 진보는 경제와 안보 정책을 놓고 큰 논쟁을 했다. 보수는 세계화 기회를 맞아 FTA(자유무역협정)를 적극 추진하면서 ‘더 큰 대한민국’(성장)을 전략으로 내세운 반면, 진보는 세계화의 그림자인 양극화를 겨냥한 ‘더 따뜻한 대한민국’(복지) 전략으로 대응했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세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을 하며 ‘평화가 경제’라고 주장하자 보수는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경제가 평화’라고 맞받았다.

세계화와 기술 혁신으로 인한 양극화 시대에 보수는 약자를 돌보는 데 게을렀다. 미·중 데탕트(긴장 완화) 시대에 중국과 북한을 다루는 데도 서툴렀다. 시나브로 보수의 지지 기반이 무너지고 있었다. 특히 불공정한 세상에 분노한 2030세대가 4050세대의 ‘민주 동맹’에 합류하자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까지 민주당의 연속 승리는 굳건한 민주 동맹 덕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민주당이 마침내 ‘주류 교체 전쟁’에서 승리한 듯 보였다.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와 트럼프 당선으로 시작된 ‘탈세계화’와 ‘미·중 패권 전쟁’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대만에 대한 중국의 군사적 위협, 북핵 위협을 거치며 냉전 시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의 대결 구도를 재연하고 있다. 젊은 세대가 ‘자유’의 가치를 알기 시작했다. ‘공정’에서 ‘자유’로 가치 전선이 이동했다.

탈세계화와 미·중 패권 전쟁이 가열되는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낡은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미국과 일본을 다루는 데 전략적으로 실패했다. 이젠 ‘경제가 평화’ ‘기술이 평화’라고 믿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민주당은 시대적 흐름을 못 읽고 30년 만의 역사적 대전환기를 맞아 새로운 노선 전환에 실패했다.

훨씬 심각한 위기는 도덕적 파산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 구속 이후 집권한 세력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책적 무능과 정치적 분열은 차치하더라도) 상대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높은 잣대와 자신에게는 한 없이 관대한 낮은 잣대를 들이댔다. ‘내로남불’은 너무 고상한 표현이다. 윤리적 파탄, 도덕적 타락이다.

2020년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이 참패한 것은 황교안 대표와 강성 지지층 때문에 ‘탄핵의 강’을 건너지 못한 탓이다. 민주당이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 문재인·조국·이재명이 보이면 민주당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이 그랬듯이) ‘야당 심판’에 직면할 것이다. 새로운 노선, 새로운 인물의 ‘NEW 민주당’이라면 해볼 만할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기대 난망이다.

민주당 위기가 심각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국민의힘이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2017년 (중도 보수의 이탈로) ‘보수 동맹’이 해체된 이후 한국 유권자 지형은 ①맹목적 민주당 지지 30% ②민주당 성향의 스윙보터 20% ③보수 성향의 스윙보터 30% ④맹목적 국민의힘 지지 20%다. 절대 지지층 규모에서 민주당이 우세다. 똘똘 뭉쳐야 50% 대 50% 싸움인데 2021년 4·7 재보선 이후 승리 공식인 ‘보수·중도 동맹’과 ‘2030세대 연대’를 스스로 해체한 터라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 누가 먼저 승리 공식인 ‘민주 동맹’과 ‘보수·중도 동맹’을 복원하느냐가 관건이다. 둘 다 실패한다면 그땐 정말 제3당에 기회가 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