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잔 발라동, 파란 방, 1923년, 캔버스에 유채, 90×116cm, 파리 국립근대미술관 소장.

살갗에 닿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냉장고 바지’가 있다면, 프랑스 화가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1865~1938)의 ‘파란 방’은 눈길이 닿기만 해도 주위 온도가 내려가는 ‘냉장고 그림’이다. 헐렁한 면바지 차림으로 비스듬히 누워 담배를 입에 문 여자가 바로 화가 발라동이다. 풍만한 상체에 핑크빛 피부가 보송보송한 걸 보니 방은 쾌적하고, 새파란 침구가 푹신해 보이지만 몸에 달라붙지 않는 모양이다.

서양 미술의 전통에서 침대에 누운 여인상은 한결같이 알몸을 드러내 관능미를 뽐내는 비너스이거나 그림 소유주의 애인이거나 매춘부였다. 그러나 그림 속 발라동은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편안하게 누릴 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자세를 바로잡거나 세상의 기준에 맞추려 자기 몸을 재단하지 않는다. 뚜렷하고 힘 있는 윤곽선, 대조적 색채들이 제각각 선명하고 대범하게 칠해진 맑은 화면에서 자유로운 그녀의 영혼이 느껴진다. 흔히 발라동은 인습에 저항하고 전통에 도전하는 반항아로 여긴다. 하지만 파리에서 세탁부로 일하는 미혼모에게 태어나 친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랐으니, 아예 인습이나 전통에 맞춰 살 형편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온갖 직업을 전전하던 발라동은 간절히 바라던 서커스 단원이 됐지만 부상으로 꿈을 접었다. 서커스에서 그녀를 눈여겨본 모리조, 르누아르, 툴루즈-로트레크 등 인상주의 화가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모델이 되면서 그녀는 그림에 눈을 뜨게 되고, 20세기 초 드물게 여성으로서 성공한 화가가 됐다. 그 뒤에는 화가들과 보낸 시간, 타고난 재능,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 개척한 자기의 삶을 자기 손으로 그려내고픈 강인한 의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