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국왕은 공문서와 모든 조약에 청나라의 연호와 달력을 사용하고 있다. ... 만약 허약한 조선이 지금 당장 독립한다면 과연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가? ... 머지않아 코리아라는 나라(a Korean nation)가 존재한다는 말을 들어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쓴 독일인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穆麟德, 1847~1901)는 1885년 영국의 거문도 점거에 맞서 엄세영과 함께 거문도와 나가사키까지 가서 영국 해군에 항의하다가 영국 정부의 압력으로 조선 정부의 외교 고문에서 해임된 인물이었다.

1871년 1월 18일 프랑스 베르사유궁전에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승리 후 독일 제2제국을 선포하는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 총리대신. 안톤 폰 베르너 1885년 작. 묄렌도르프가 고종에게 조선과 러시아가 밀착하는 정책을 건의한 것은 비스마르크가 추진하고 있던 독·러 동맹정책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위키피디아

묄렌도르프의 글은 그의 후임 미국인 데니(Owen N. Denny, 1838~1900)가 1888년 출판한 ‘China and Korea(청과 조선)’의 다음과 같은 논지에 대한 반박이었다.

“국제 문제에 조예가 있는 사람은 조선을 종속 국가로 볼 수 없다. 법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조선은 주권 독립 국가 대열에 속해 있고, 앞으로도 강대국이 힘을 합해 조선을 그 대열에서 끌어내지 않는 한 그러한 독립성은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묄렌도르프는 조선이 섣불리 독립을 추구한다면 청의 속국보다 못한 상태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묄렌도르프는 청의 속국 상태인 조선에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장기적으로 중립화하는 것이 조선을 위한 길이라고 보았다.

데니의 조선 독립론 대 묄렌도르프의 조선 속국론

현재의 많은 한국인은 데니의 주장에 공감하고, 묄렌도르프의 주장에 반감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1894년 일본이 주장한 청일전쟁 개전 이유(casus belli)가 데니의 주장과 같았다.

조선 관복을 입은 묄렌도르프. 독일인인 그는 청나라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의 외교 고문을 지냈다. /위키피디아

이에 비해 묄렌도르프의 주장은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의 입장과 유사했다. 한문은 물론 만주어에도 능숙했던 묄렌도르프의 조선 속국론은 과거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미래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종은 한때 총애했던 묄렌도르프의 복귀가 아니라 데니와의 재계약을 선택했다.

데니는 물론 묄렌도르프도 1637년 병자호란에서 조선왕이 굴복한 것은 한인(漢人)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만주인들에 대한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1911년 만주 황실이 무너지고 한인들이 중화(中華) 민족 개념에 입각해서 세운 나라들과 한반도의 관계에 묄렌도르프의 속국론을 인용할 수는 없다.

영국에 의존하면서도 독일인을 중용했던 이홍장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은 태평천국군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의 도움을 받았고, 이후에도 영국에 많이 의존했다. 그러나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일환으로 1871년 프랑스를 꺾은 독일인들도 중용했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오야마 이와오도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독일에 주목하던 시절이었다.

이홍장이 중용한 독일 출신 인물들로는 데트링(Gustav Detring, 德璀琳, 1842~1913)과 한네켄(Constantin von Hanneken, 漢納根, 1854~1925)이 있었다. 데트링은 영국인 하트(Robert Hart, 赫德, 1835~1911)를 견제했는데, 하트는 1863년 이후 무려 48년간 총세무사로서 청나라의 관세를 관리했다.

한네켄은 이홍장을 도와 뤼순, 다롄, 웨이하이의 포대(砲臺)를 구축하고 북양군을 육성했다. 1894년 7월에는 조선 형세를 보고 오겠다며 동학 농민 봉기 진압을 위한 청군 증원 병력을 태운 영국 수송선 고승호에 탑승했다. 고승호가 도고 헤이하치로 대좌가 지휘하던 일본 전함의 공격을 받고 충청도 풍도 앞바다에 침몰하자 헤엄쳐서 섬으로 피신했다. 그는 제물포(인천)의 영국 부영사 W.H. 윌킨슨을 찾아가 영국 수송선 피격 사실을 알렸다.(그러나 영국은 결국 일본 편에 섰다.)

묄렌도르프는 청나라에 있는 동안 독일 크루프(A. Krupp)사의 무기를 청국군에 독점 판매하는 계약을 성사시켰다. 독일 불칸사에서 제조한 철갑함들도 그를 통해 청국으로 수입되었다.

이홍장을 배신한 묄렌도르프의 조-러 접근책

1882년 조선으로 하여금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토록 했던 이홍장은 그해 12월 조선에 묄렌도르프를 파견했다. 당시 청나라는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 경계선을 넘어 두만강까지 남진한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해 조선이 청나라와 친밀한 동시에 일본과 결속하고, 미국과도 연대해야 한다는 조선 책략을 갖고 있었다. 이홍장은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마건충을 보내 미국과의 조약문 작성을 도왔다. 조약문 안에 조선이 청의 속국이라고 삽입하려 했지만 미국 대표 슈펠트(Robert Shufeldt)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 같은 해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안에 조선이 청의 속방이라고 명기했다.

1882년 겨울 조선 정부에 부임한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외교뿐만 아니라 재정 상태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게 되었다. 덕분에 1883년 제물포에 문을 연 독일 회사 세창양행도 번창했다. 1883년 11월에는 대조선국 대덕국 통상 조약(大朝鮮國大德國通商條約)이 체결되었다. 현재 양국은 이때부터 기산해서 수교 14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1884년 12월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킬 무렵 묄렌도르프는 고종에게 “조선이 처한 위협에 대한 예방책으로서 조선의 군대를 러시아 장교들을 통해서 조직”하는 것만이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싸움의 원인이 되는 위협”에서 조선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고 건의했다. 당오전(當五錢) 발행을 지지했던 묄렌도르프와 달리 김옥균은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오려고 했다.

묄렌도르프는 독일 영사대리 부들러(Hermann Budler)와 함께 러시아를 끌어들여 러·청·일이 보장하는 조선 중립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자신을 조선에 추천했던 이홍장의 러시아 남진 방어론과는 엇나갔다.

비스마르크 체제와 함께했던 묄렌도르프

묄렌도르프가 추진한 조-러 접근은 당시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추진하고 있던 독-러 동맹 정책과 맥을 같이했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은 인도차이나반도를 제공하겠다는 프랑스의 제안을 무시하고 알자스-로렌 지역을 챙겼다(제1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프랑스 영토). 그리고 프랑스가 러시아 등 다른 어떤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못하는 국제 체제를 만들었다.

이 비스마르크 체제는 1890년 비스마르크를 빌헬름 2세가 경질하면서 와해되기 시작했다. 대신 러시아와 동맹을 체결하는 것을 시작으로 독일을 포위하는 프랑스 외무장관 델카세의 국제 체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가 악화되고, 러시아와 프랑스가 동맹을 맺게 되는 국제 정세에 따라 묄렌도르프는 러시아에도 기피 인물이 되어 갔다. 1899년 12월 묄렌도르프는 고종의 전문을 인용하며 “러시아와 일본의 공사들이 나의 고문 (재)임용을 반대”하고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해 있다가 환궁하여 1897년 조선 대신 대한국(대한제국 또는 구한국이라고도 불리는)을 선포하고, 러시아제국의 차르나 독일 제2제국의 카이저와 같은 황제가 되었다. 국제적 주권 독립은 이룩했지만 국민 주권에는 역행하고 있었다. 1899년 공포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는 “만세토록 불변할 전제정치”라고 스스로를 규정하고, 대한국 대황제가 제반 약조를 체결한다고 함으로써 국민 주권에 거스르는 일제의 을사보호조약 체결 요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말았다.

대한제국의 독립과 묄렌도르프의 비극적 최후

독일은 프랑스와 함께 러시아의 3국 간섭에 동참하여 존재감을 과시했다. 1895년 청일전쟁 결과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일본이 차지했던 요동반도는 다시 청나라로 환부(還付)되었고, 독일은 교주만을 조차한 후, 청도(靑島, 칭다오)에 독일 맥주 공장을 세웠다.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약속된 조선의 독립도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지켜질 수 있었다.

묄렌도르프는 1901년 사망할 때까지 한반도로 복귀하고자 했다. 그는 민씨 권력층의 중심인물로서 홍콩에 망명했던 민영익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묄렌도르프는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서재필이 지휘하는 병사들에게 민영익이 치명상을 입었을 때, 그를 미국인 의료 선교사 알렌에게 데려가 목숨을 구했었다.

고종과의 서신 왕래도 이어졌다. 1898년과 1899년 두 번씩이나 대한제국을 방문했던 하인리히 왕자(빌헬름 2세의 동생)는 상하이에서 묄렌도르프를 만나 재기를 격려했다. 그러나 묄렌도르프는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뀐 한반도로 복귀하지 못했다. 1901년 4월 20일 저장성 닝보(寧波)에서 독일에 있던 아내에게 전보를 보내고, 외교 클럽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위경련을 일으켜 숨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