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1930년대 들어 만주국 경영에 나선 일본은 악화되는 영·미 관계 개선 방안에 골몰한다. 이때 은밀하게 추진한 비책(秘策) 중 하나가 유대 세력을 포섭하여 일본의 조력자로 삼는 방안이었다. 종교나 역사에 기인한 반유대 정서와 거리가 있는 일본은 유대 민족을 보는 시각이 유럽국과는 전혀 달랐다. 러일전쟁 당시 미국의 유대계 금융가 제이컵 시프의 협조로 천신만고 끝에 전비를 조달할 수 있었던 경험도 유대 인식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치의 발흥으로 유대인의 유럽 엑소더스가 가시화되자 만주국 경제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던 닛산 콘체른의 아유카와 요시스케(鮎川義介), 유대 전문가인 육군의 야스에 노리히로(安江仙弘), 해군의 이누즈카 고레시게(犬塚惟重) 등은 만주국(또는 상하이)에 유대인 집단 거주지를 조성하는 구상을 한다. 유럽에 발이 묶인 유대인 수만 명을 받아들여 자치권을 부여하는 한편, 그 대가로 유대 자본을 유치하고 미국의 금수 조치 완화를 위한 막후 협조를 얻는다는 발상이었다.

이들의 구상은 1938년 12월 오상(五相) 회의(총리·재무·외무·육군·해군 대신이 참석하는 최고위 정책 협의체)에서 채택한 ‘유대인 대책 요강(要綱)’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구상은 ‘복어[河豚] 계획’으로도 알려졌다. 맛있지만 맹독을 조심해야 하는 복어처럼 유대인의 가공할 영향력을 일본의 국익에 활용하되, 그에 따른 부정적 영향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만주국 거주 유대인들로 결성된 극동유대인협회를 창구 삼아 미국 내 유력 유대인을 대상으로 암암리에 로비를 벌였으나,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일본의 구상은 설 자리를 잃는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일본의 구상이 열매를 맺었다면 만주 어딘가에 유대인 자치구가 존재했을 수도 있었던 격동의 역사가 멀지 않은 시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