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문제아였던 적은 없다. 나를 포함, 기자라는 사람들이 그렇다. 학창 시절 잘난 외모로 유명해 근처 학교까지 소문이 났던 친구들은 기자가 되지 않는다. 교실 뒷자리를 장악하고 주먹 좀 치고 다녔던 친구들도 기자가 될 리는 없다. 샌님처럼 공부만 하던 다소 병약한 친구들이 택하는 직업 중 하나가 기자다. 쓰고 보니 기자라는 직업군에 대한 편견을 키우는 것 같아 조금 떨떠름하긴 하다. 어쩌겠는가. 사실은 사실이다. 당장 조선일보 편집국을 둘러봐도 드물게 강하거나 드물게 잘생긴 사람은 드물 것이다(아니라면 죄송합니다). 나도 좀 전에 거울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본 뒤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니 이것은 편견이 아니다. 자폭이다.

당연히 나는 학폭(학교 폭력) 가해자보다는 피해자가 될 확률이 더 높은 아이였다. 첫 학폭은 중학교 3학년 시절에 벌어졌다. 마산 살던 나는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부산으로 이사했다. 같은 경상도지만 마산과 부산은 달랐다. 마산은 외지인이 드문 도시였다. 친구들이 다들 같은 중학교로 입학한 덕에 아는 얼굴은 어느 반에나 있었다. 복도에서 달리다 부딪치면 서로 미안하다는 사과를 건넸다. 전학 간 첫날 나의 세계는 흔들렸다. 복도에서 누군가 달려오더니 나와 부딪쳤다. 사과를 받을 거라 생각했다. 돌아온 건 당대 최고 수준의 경상도식 욕설이었다. 대도시인 부산은 거칠었다. 해리포터 왕국에서 그리핀도르에 들어갈 것을 꿈꾸고 호그와트에 입학했는데 슬리데린에 들어간 머글이 된 기분이었다. 물론 그 시절에는 해리 포터가 없었으니 이 표현은 순전히 지금의 내가 지어낸 것이다.

그래도 친한 친구가 몇 생겼다. 하나는 덩치가 좋고 인물이 훤칠했다. 그 친구는 내 소니 워크맨으로 함께 머라이어 캐리 노래 듣기를 좋아했다. “이 여자는 그냥 보통으로 부를 때도 이선희 제일 높은 음정을 치네!” 팝송을 처음 들어보는 그는 감탄했다. 음악도 좋아하고 인물도 좋고 노래도 잘 부르니 가수가 되면 딱 좋을 친구였다. 우정은 금방 끝났다. 여름방학이 지나자 친구는 주먹 좀 쓰는 애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방과 후 마을버스를 타러 걸어가는데 친구가 불량해 보이는 고등학생들과 내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는 척을 하려 하자 친구는 “뭘 봐 이 새끼야” 하며 내 가슴을 강하게 주먹으로 쳤다. 나는 나가떨어졌다. 고등학생들이 낄낄대며 웃었다. 우리의 세계는 달라졌다. 그 후로도 몇 번인가 더 맞았다. 그에게는 한때 나 같은 샌님과 친하게 지냈다는 것이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데 그 친구는 맞은 나보다 상처가 더 큰 아이였다. 세탁한 흔적도 없는 같은 잠바만 매일 학교에 입고 오는 걸 보고 깨달았어야 했다. 세상이 잡지에 나올 것 같은 단란한 4인 가족으로만 구성된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다만 그런 아이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정도로는 성숙한 나이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나는 잠자코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 시절 고등학교는 정글이었다. 정글에서 살아남으려면 머리를 잘 굴려야 했다.

갑자기 30여 년 전 이야기를 꺼낸 건 내가 요즘 열심히 파는 아이돌 가수 때문이다. 마흔 중반에 아이돌을 판다는 게 좀 민망한 일이긴 하지만, 나는 아이돌을 좋아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서도 분명 뉴진스나 르세라핌, 아이브를 좋아하는 아재나 줌마 팬들이 있을 것이다. 슬프게도 요즘 아이돌을 판다는 건 꽤 리스크가 있는 일이다. 얼마 전부터 나는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이돌 학폭 감지기’로 불리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아이돌이 죄다 학폭 논란에 휘말렸다. 좋아하던 걸그룹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멤버들이 연이어 학폭으로 그룹을 탈퇴했다. 최근에는 남자 아이돌 그룹 하나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는데, 어럽쇼. 데뷔하자마자 하필 내가 좋아하는 멤버들에 대한 폭로가 인터넷에서 터져 나왔다. 약간 불량해 보이는 과거 사진이 하나씩 공개됐다. 사진 몇 장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다. 인터넷이라는 곳이 어디 그런가. 당신의 과거 사진 한 장은 당신의 인생을 마비시킬 수도 있다. 오해라고 부르짖어도 소용없다. 그건 내 삶의 아주 작은 조각일 뿐이라고 말해봐야 누구도 듣지 않는다.

소셜미디어로만 세상을 본다면 2020년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윤리적인 시대일 것이다. 지난 시대의 우리는 연예인의 거친 과거를 오히려 재미있어했다. 놀던 애들이 역시 잘 논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에도 미디어는 연예인들의 과거를 팠다. 누구는 고등학생 때 누구랑 동거했대. 누구는 어느 학교 짱이었대. 누구는 중학교 때부터 담배를 피웠대. 그 정도는 다들 웃으며 넘겼다. 그런 애들이니까 딴따라를 잘하는 거라고 여겼다. 그런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제 좀 놀던 애들은 아이돌이 될 수 없다. 데뷔하는 순간 과거 사진과 증언들이 인터넷을 폭파하며 발목을 잡을 것이다. 담배를 피우거나 여자 친구와 뜨겁게 노는 사진 한 장으로도 경력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이 시대의 아이돌이 되려면 학창 시절부터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서울대에 가려면 모범생이 되어야 하고 하이브에 들어가려 해도 모범생이 되어야 한다. 모범생의 역습이다. 아니다. 나는 그래서 재미없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학폭은 사라져야 한다. 모든 종류의 폭력은 없어지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인류의 진화일 것이다. 다만 나는 종종 중학교 시절 친구를 생각한다. 머라이어 캐리를 좋아하던 그 잘생긴 놈은 뭐가 됐을까. 어디 나이트클럽에서 다른 가수들 모창이라도 하며 살고 있을까.

사실 나는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사랑하지 못한다”는 마틴 루서 킹의 따뜻한 말로 이 글을 끝내고 싶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의 반대편에 있던 맬컴 엑스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에게 굴욕을 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사람은 정상이 아니다.” 그러니 이 글의 결론도 결국 마틴 루서 킹과 맬컴 엑스 사이의 어딘가에 어중간하게 존재할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