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예전에 공대 전자공학과나 자연대 물리학과가 의예과보다 더 들어가기 힘든 때가 있었다. 실제로 1985년 이과 입학 성적을 보면 서울대는 물리학과, 의예과, 전자공학과 순이었다. 1995년만 해도 이과 전국 10위권 학과에 의약학 계열이 절반, 이공계가 절반 정도로 섞여 있었다. 이런 경향이 확 바뀐 것이 1997년 IMF 이후다. 당시 연구소 연구원들이 구조조정 명목으로 잔뜩 해고당했고, 경제가 되살아난 뒤에도 이들은 원래 직장으로 복직하지 못했다. 대덕 연구 단지의 치킨집 사장이 다 박사라는 자조적인 얘기가 돌았다. 이런 경험을 한 박사가 자식을 다시 이공계로 보낼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전국 상위권 학과 30곳이 모두 의학 계열이다. 과학고, 영재고 같은 특목고 학생들은 의대 진학을 안 하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하고 벌점을 줘도, 8명 중 1명꼴로 의학 계열에 진학한다. 대학에 들어간 뒤에 ‘반수’를 해서 의대를 가는 과학고 학생도 많다. 이렇게 상위 0.1~1%가 모두 의대에 진학하는 것은 국가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똑똑하고 창의적인 학생은 과학이나 공학을 전공해서 신산업을 만들고 기존 산업을 혁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상위권 학생의 의대 쏠림이 의대를 위해서 좋을까? 의대 교수들과 얘기해 보면, 의대에 가는 학생은 상위 5% 정도면 충분하다고들 한다. 더 중요한 것은 환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 봉사 정신, 인성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은 의대를 위해서도 별로 좋을 게 없다.

의대 정원을 둘러싼 파동을 겪으면서, 의대 쏠림 현상이 결국 의사들의 높은 수입과, 정년 없이 오래 일할 수 있다는 직업적 이점 때문이라는 사실을 온 국민이 알게 됐다. 이공계 대학에서는 의대 정원이 크게 늘면 대학을 그만두고 의대 입시를 위해 휴학이나 자퇴할 학생들이 늘어날까 전전긍긍한다. 그렇지만 의대 정원이 늘면 장기적으로 의사의 수입이 줄고, 학생들은 과학과 공학을 포함한 더 다양한 진로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의대로서도 좋은 학생을 받을 기회가 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