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벌(閥)은 본래 가문의 공훈(功勳)을 이르는 말이다. 문벌, 벌열(閥閱) 등의 형태로 가문의 지위나 격(格)을 나타내는 것이 원래의 뜻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그보다는 ‘출신, 소속, 이해관계 등을 같이하는 무리’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족벌, 학벌, 파벌 등 다양한 파생어를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벌을 이러한 의미로 쓰기 시작한 것은 근대화 시기 일본이다. 신분제의 상징인 문벌제도가 폐지되자, 이제는 혈연, 지연, 학연 등 사적 관계가 암묵적인 세력화로 이어지고 공적인 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벌’의 쓰임새가 확장된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번벌(藩閥)’의 등장을 들 수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삿초도히(薩長土肥)’라 불리는 서남 웅번 출신들이 주요 관직을 독차지하고 국정을 농단하는 세태를 두고 만들어진 말이다.

벌의 원조국답게 일본에는 다양한 벌이 있다. 재벌, 군벌, 관벌, 규벌(閨閥) 등은 시대별로 지배 세력의 성격이나 양태를 직관적으로 나타내는 신조어라고 할 수 있다. 규벌은 혼인을 통해 형성된 상류층 혈연 네트워크를 말한다. 규(閨)는 아녀자들이 거주하는 방이라는 뜻이다. 기득권을 세습하는 특권층이 ‘금수저’라면, 규벌은 혼맥으로 연결된 금수저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기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카다 다케마쓰(岡田武松)는 일본의 기상예보 시스템을 설계한 국보급 과학자였다. 군부의 지시를 거부하고 현직에서 물러난 그는 패전을 맞아 “군벌은 멸망했지만, 앞으로는 법벌(法閥)에 주의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현장을 지키는 과학자의 눈에는 정치와 관료 사회를 주도하는 법기술자 무리들이 법벌로 비친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다양한 일본산(産) 벌의 개념은 대부분 한국 사회에도 적용 가능하다. 사회 병폐 측면에서는 더 중증의 느낌마저 있다. 때로는 뭉치면 죽고 흩어져야 산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