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덟 살이었던 아버지는, 마을 공회당 마당에서 할아버지를 찾기 위해 매 맞고 널브러진 사람들을 하나하나 뒤집어 보던 기억을 갖고 있다. 같은 때 일곱 살이었던 엄마는, 짐꾼으로 차출되어 끌려가던 남자들의 행렬에서 외할아버지가 자꾸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던 기억을 지니고 있다. 올해 여든둘, 여든한 살이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아버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던 일고여덟 살 아이로 돌아간다. 불도장을 찍은 듯 선명한 기억을 간직하고도 그들은 한 번도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여태껏 물어본 적이 없잖아?”

묻지 않았기에 말하지 않았다. 몇 백, 몇 천 년 전에 존재했던 국가와 민족의 역사는 마르고 닳도록 주워섬기면서, 내 피붙이들이 어떻게 시대와 부대끼며 살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묻지 않았기에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절반의 진실이다. 나머지 절반은 ‘피해자’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집안이기에 고초를 겪어야 했던, 아버지가 홀로 간직하며 감당한 비밀이다.

천생 농사꾼이었던 할아버지를 이장이라는 이유로 끌고 가 뭇매질한 인민위원회 위원장은 남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삼촌이었다. 동족상잔이 형제혁장(兄弟鬩牆)으로 집안에서 재현되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사람들 더미에서 피로 칠갑한 할아버지를 찾아냈다. 할아버지의 여동생인 왕고모가 초주검이 된 오라비를 들쳐 업었다. 태산처럼 크고 무거운 가장을 걸머진 소녀와 어린아이가 함께 걸었을 고샅길을 떠올리면 목울대가 뜨거워진다.

사납던 시절에는 아버지의 근무지마다 담당 형사가 찾아와 동향을 살폈다고 한다. 연좌제가 폐지된 후 문자 그대로 ‘빨간 줄’이 그어진 서류를 수정하며 아버지가 느꼈을 복잡한 심정은, 한때 아버지를 ‘보수 꼰대’로 몰아세우며 공격했던 불민한 딸을 부끄럽게 한다.

‘스토리’는 사실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삶의 비밀을 밝히고 사람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1950년 6월 29일, 서울 출장을 갔던 강원도교육청 소속 교원 일행은 전쟁으로 교통편이 끊기자 걸어서 춘천으로 돌아오다가 마석에서 인민군과 마주쳤다. 인민군은 일일이 신분을 물어 장학사와 교장·교감을 그 자리에서 총살하고 일반 교원들은 풀어 주었다. 전쟁 시작 나흘 만에 살해당해 가매장한 윤찬규 장학사의 시신은 휴전 후에야 의복과 소지품으로 신원을 확인해 수습할 수 있었다. 그때 김진태 강원도지사의 어머니 윤종애 씨는 창졸간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와 10남매의 생계를 책임진 소녀가장이 되었다. 김진태 지사의 아버지 김한규 씨는 6.25 참전용사이자, 1951년부터 2002년까지 7,987명의 동지를 잃은 국군정보사령부특임대(HID)의 북파공작원이었다. 지금도 강원특별자치도교육청 앞마당에는 윤찬규 장학사를 비롯한 순직 교원들을 기리는 동상이 우뚝하고, 화랑무공훈장 두 개를 수여받은 김한규 대위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어 계신다. 가족의 ‘스토리’는 이념을 넘어 곧바로 삶에 육박한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김진태 지사는 단순히 ‘수구 꼴통’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매타작을 당한 나의 할아버지는 왕고모가 걸러내 온 똥물을 마시고 장독(杖毒)을 다스렸지만, 한번 꺾인 기력을 회복하지 못해 일찍 돌아가셨다. 짐꾼의 쓸모를 다한 외할아버지는 등 뒤로 쏟아진 총알 세례가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 다른 사람을 맞추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누군가의 가족이 죽어 누군가의 가족이 살아남았다. 그토록 처절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더 이상 세상에 없지만, 그들의 자손인 나는 그들로 인해 여기에 있다. 잊거나 잃어버린 ‘스토리’를 돌이켜 곱씹는 유월, 얄팍했던 삶이 갑자기 아프게 두터워진다.

김별아 소설가